메종드 쭌/무비일락
우리에게도 일상의 판타지가 필요해
낭만_커피
2010. 7. 25. 23:59
6월은 우리에게, 그렇다.
피 묻은 민주화와 인권을 향한 항쟁이 있었고,
분노와 슬픔을 이끌어냈던 미선이와 효순이의 죽음이 있었다.
반 세기도 넘은 과거에는 현대 한국 사회를 규정한 전쟁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6월을 얘기하라면, 빼놓을 수 없는 이것. 월드컵.
현재 진행형인 월드컵도 2010년 6월의 대한민국을 달구겠지만,
지난 2002년 6월의 대한민국은 생경한 경험이었다.
일찍이 대한민국에서 이같은 광경을 보고 느끼고 경험한 적이 없으며, 들은 적도 없었다.
일상의 굴레를 훌훌 던지고 빨간 색으로 국토를 뒤덮은 붉은 악마들, ‘대∼한민국’을 연호하던 자동차 경적과 응원의 함성, 초원을 질주하듯 녹색구장에서 터질 듯한 율동을 선보이던 육신의 황홀했던 순간들… 대한민국은 이 낯선 풍경을 경험했다.
그해 6월, 놀라고 뜨악했다. 대한민국에서 그런 축제가 가능할지, 상상해 본 적이 없다.
지역주의, 안보반공주의, 권위주의, 연고주의 등 거부하고 싶지만 일상과 밀착된 굴레를 그 축제동안 무시하고 ‘해방구’를 찾아 일탈을 감행했던 기억.
한마디로 짜릿하면서도 무서웠다. 모두가 한 목소리를 내는 것이.
취향이 명분과 계율을 압도했던, 적어도 한국 사회에선 드문 광경이었다.
많은 이들이 축제를 즐겼고 사소한 취향과 쾌락에 몸과 마음을 맡겼다.
축제의 핵심이 몰입이듯, 그냥 즐겼을 따름이다.
축구라는, 전 세계가 공히 즐기는 단일 스포츠종목의 힘은 유사종교나 마찬가지였으나, 종교가 은연중에 강요하는 교리따위 없이 자발적이고 자연스런 연대가 엄연히 존재한 잊지못할 ‘추억’이었다.
약자들의 반란이 즐거운 이유
그때 그렇게 우리를 ‘엑스터시’에 빠지게 만든 ‘한바탕 대동굿’의 기억이, 지금 여기의 6월을 주도하고 있음도 분명하다. 특히, 당시 세계 축구계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변방에 있던 한국, 세네갈, 터키 등이 돌풍의 주역이 됐던 것도 즐거웠다. 약자들의 반란이랄까. 약자가 승부나 우열을 뒤집는 쾌감이란, 경기 그 자체의 쾌감을 극대화하기도 한다.
<소림 축구>가 그랬다. 그건 스크린에 펼쳐지는 힘없고 버림받은 현실의 낙오자들이 세상을 놀래키는 승자로 변모하는 ‘깜짝쇼’였다.
키워드는 뭐니뭐니해도 ‘주성치’다. ‘희극지왕’이란 타이틀을 가진 홍콩영화계의 주춧돌, 주성치가 축구를 다뤘다. 주성치식 코미디는 한국 관객들에게 ‘모 아니면 도’에 가까운 평가를 받았다. 유치짬뽕이거나 혹은 재기발랄. 주성치(영화)의 매니아들은 말한다. “세상엔 두 종류의 영화가 있다. 주성치가 나오는 영화와 그렇지 않은 영화가 있다.”
<소림 축구>는 예상치 못한 웃음과 애수를 동반한다. 희극과 비극이 묘하게 섞였으며, 관객을 한 순간에 자지러지게 만드는 황당무계함은 ‘판타지’나 다름 없다. 영화를 보는 동안, 현실에 발 붙이고 있을 필요가 없다. 영화속 이야기가 고단한 현실과 오버랩될만 하면, 이내 딴죽을 피우며 농담을 건넨다. 그 예측불허의 기지는 감탄사를 절로 연발케 한다. 장르도 뒤죽박죽 섞인다. 뮤지컬, 홍콩 느와르, 서부극, 전쟁극 등 그 변신 한 번, 기발하고 재기 넘친다. 축구를 소재로 이렇게 다양한 서브장르가 만들어질 수 있다니, 놀랍도다. 한마디로, 예사 코미디 영화가 아니다.
사회적 약자의 도약을 위해 필요한 것
사회적 약자들에겐 기회 자체가 봉쇄돼 있다는 것이 문제다.
그들이 어떤 재능과 능력을 지녔는지 사회는 관심이 없다. 또 실수나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사회구조는 약자를 더욱 고립되게 만든다. 실패는 뭣보다 꿈을 꾸지 않는다. 꿈이 없는 사회는 미래가 없다.
씽씽(주성치)도 그런 면에서 돌연변이다. 소림사 여섯 사제중 한 명인 그는, 쿵푸로 세상을 변화시킬 것을 ‘꿈꾸는’ 몽상가 청년. 그러나 현실에서 그는 쓰레기더미를 나르는 루저. 아무도 초라한 젊은이의 꿈을 믿지 않는다.
그런 그의 꿈에 동반자가 생긴다. 젊은 시절, 페널티킥 실축으로 스타에서 거렁뱅이로 전락한 ‘황금발’. 그 역시 한 번의 실패로 나락으로 떨어진 사회적 약자. 쿵푸와 축구의 접목을 원하는 씽씽에게 황금발은 축구팀을 만들자며 떡밥을 던진다.
꿈꾸는 자는 멈추지 않는다. 현실 속에 침잠한 나머지 소림사 사형과 사제를 찾아 함께 꿈을 찾자고 설득에 설득. 우여곡절 끝에 축구팀이 탄생하지만, 그들이 맞닥뜨려야 할 현실은 살벌하기 그지 없다.
홍콩 영화지만, 그건 우리네 현실과 다르지 않다. 하긴, 이권의 문제에서 어디 자유로운 곳이 얼마나 있으랴. 음모를 통해 탈취한 돈과 권력으로 약자를 깔보고 짓누르면서 자기 잇속만 고스란히 챙겨먹는 축구계의 불한당은 미디어를 조작하고 대중을 농락한다. 버려진 약자들만 고통을 ‘전담’한 채 쓸쓸한 정서를 덮어쓴다.
잠깐 잊지마라. 이 영화, 선전포고 했듯이, 판타지다.
축구라는 판타지를 통해 ‘뒤집기’를 시도한다. 쓸모없다고 내동댕이쳐진 사람들이 무언가를 성취하는 위해 그들만의 리그를 꾸린다. 굴욕을 당해도, 환멸속에 있어도, 그들은 참고 견디면서 있는 놈들에게 똥꼬 깊숙이 똥침을 날린다. 황당해도 짜릿한 쾌감이다.
그 와중에 끼어드는 씽씽과 무이의 로맨스는 가난한 연인들의 자화상이다. 묘한 울림이다. 발가락이 튀어나오는 헌 운동화와 이를 기우는 사랑의 모습. 사랑에도 스펙을 따지는 피도 눈물도 없는 시대, 시대착오적이라는 말을 듣는 한이 있어도, 사랑은 조건으로 짜집기가 되지 않는다. 씽씽과 무이는 알려준다. 눈물젖은 만두와 함께 연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진심’이라고.
판타지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
<소림 축구>를 판타지로 보는 명분은 명확하다. 범접할 수 없는 철통같은 시스템으로 중무장한 현실은 약자 편에 제대로 서 본 적이 없다. 이미 고정된 신분과 계급의 세습은 ‘질서파괴’라는 죄목으로 역전의 드라마를 어지간하면 용납하지 않는다. 다만 구색을 갖추고 전복을 막기 위해, 개구멍 정도만 열어놓고선 ‘세상은 노력하면 이렇듯 살만해’하며 극소수를 받아들일 뿐이다. 선심 쓰는 척 한다.
<소림 축구>가 그런 약자에게 위로를 건네는 방법.
현실에선 뛰어 넘으려다 바지가랭이만 찢어질 일들을 태연자약하게 이뤄낸다. 판타지로서의 면모가 유감없이 발휘되는 순간. 환멸을 참고 견디는 방법. 얼지 마, 죽지 마, 아마도 부활할 거야.
어쩌면 그것이 판타지가 존재하는 이유다. 고단한 일상의 굴레를 잠시나마 잊기 위한 마약과도 같은 영화. 그리고 우리에게 다가왔었던 판타스틱한 축제가 있었다. 지금 누군가에겐 다시 축제가 열렸다. 신나게 외치며 몸을 맡길 것이다. 그리고 꿈꿀 수 있는 자유.
영화의 상영시간이 끝나면, 우리는 고단한 현실 속으로 다시 편입된다. 축제도 그렇게 영원하지 않다. 오르가슴에 도달한 뒤의 허망함을 우린 경험해야 한다. 하루둘 추스리며 생활속으로 편입된 사람살이는 이전과 별 다를 바 없을 것이다. 한판 신명나는 잔치가 ‘있었다’는 과거형의 사실만 뇌리에 박힐 뿐.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일상에 소소한 판타지를 주입하는 것. 혁명이든, 전복이든, 뭣보다 우리의 편협하고 편파적인 취향에 따라 꿈을 꾸는 것. 그리하여, 우리만의 축제를 만들어보는 것. 아마도 높으신 분들은 정치적인 수사를 구사하며 우리의 욕망을 조절하려 할 것이다. 국운융성이니 국격 상승 등의 아리송한 수사를 써가면서. 국가 번영과 국민의 안녕을 걱정하시느라 노심초사하시는 지도자분들의 근엄한 표정따위는 ‘헐리우드 표정연기’로 치부하라.
지금 필요한 건 뭐?
우리의 판타지를 자극하는 우리들만의 축제!
나는 그것이 '혁명'이었으면 좋겠다.
축제 같은 혁명.
좁은 뜻의 권력 주체가 바뀌는 그런 체제 전복적 혁명보다 더 넓은,
혹은 상상력이 가미된 진짜 일상의 혁명.
아, 그런 혁명이 어떤 것일지, 당신과 함께 상상하고 싶다.
피 묻은 민주화와 인권을 향한 항쟁이 있었고,
분노와 슬픔을 이끌어냈던 미선이와 효순이의 죽음이 있었다.
반 세기도 넘은 과거에는 현대 한국 사회를 규정한 전쟁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6월을 얘기하라면, 빼놓을 수 없는 이것. 월드컵.
현재 진행형인 월드컵도 2010년 6월의 대한민국을 달구겠지만,
지난 2002년 6월의 대한민국은 생경한 경험이었다.
일찍이 대한민국에서 이같은 광경을 보고 느끼고 경험한 적이 없으며, 들은 적도 없었다.
일상의 굴레를 훌훌 던지고 빨간 색으로 국토를 뒤덮은 붉은 악마들, ‘대∼한민국’을 연호하던 자동차 경적과 응원의 함성, 초원을 질주하듯 녹색구장에서 터질 듯한 율동을 선보이던 육신의 황홀했던 순간들… 대한민국은 이 낯선 풍경을 경험했다.
그해 6월, 놀라고 뜨악했다. 대한민국에서 그런 축제가 가능할지, 상상해 본 적이 없다.
지역주의, 안보반공주의, 권위주의, 연고주의 등 거부하고 싶지만 일상과 밀착된 굴레를 그 축제동안 무시하고 ‘해방구’를 찾아 일탈을 감행했던 기억.
한마디로 짜릿하면서도 무서웠다. 모두가 한 목소리를 내는 것이.
취향이 명분과 계율을 압도했던, 적어도 한국 사회에선 드문 광경이었다.
많은 이들이 축제를 즐겼고 사소한 취향과 쾌락에 몸과 마음을 맡겼다.
축제의 핵심이 몰입이듯, 그냥 즐겼을 따름이다.
축구라는, 전 세계가 공히 즐기는 단일 스포츠종목의 힘은 유사종교나 마찬가지였으나, 종교가 은연중에 강요하는 교리따위 없이 자발적이고 자연스런 연대가 엄연히 존재한 잊지못할 ‘추억’이었다.
약자들의 반란이 즐거운 이유
그때 그렇게 우리를 ‘엑스터시’에 빠지게 만든 ‘한바탕 대동굿’의 기억이, 지금 여기의 6월을 주도하고 있음도 분명하다. 특히, 당시 세계 축구계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변방에 있던 한국, 세네갈, 터키 등이 돌풍의 주역이 됐던 것도 즐거웠다. 약자들의 반란이랄까. 약자가 승부나 우열을 뒤집는 쾌감이란, 경기 그 자체의 쾌감을 극대화하기도 한다.
<소림 축구>가 그랬다. 그건 스크린에 펼쳐지는 힘없고 버림받은 현실의 낙오자들이 세상을 놀래키는 승자로 변모하는 ‘깜짝쇼’였다.
키워드는 뭐니뭐니해도 ‘주성치’다. ‘희극지왕’이란 타이틀을 가진 홍콩영화계의 주춧돌, 주성치가 축구를 다뤘다. 주성치식 코미디는 한국 관객들에게 ‘모 아니면 도’에 가까운 평가를 받았다. 유치짬뽕이거나 혹은 재기발랄. 주성치(영화)의 매니아들은 말한다. “세상엔 두 종류의 영화가 있다. 주성치가 나오는 영화와 그렇지 않은 영화가 있다.”
<소림 축구>는 예상치 못한 웃음과 애수를 동반한다. 희극과 비극이 묘하게 섞였으며, 관객을 한 순간에 자지러지게 만드는 황당무계함은 ‘판타지’나 다름 없다. 영화를 보는 동안, 현실에 발 붙이고 있을 필요가 없다. 영화속 이야기가 고단한 현실과 오버랩될만 하면, 이내 딴죽을 피우며 농담을 건넨다. 그 예측불허의 기지는 감탄사를 절로 연발케 한다. 장르도 뒤죽박죽 섞인다. 뮤지컬, 홍콩 느와르, 서부극, 전쟁극 등 그 변신 한 번, 기발하고 재기 넘친다. 축구를 소재로 이렇게 다양한 서브장르가 만들어질 수 있다니, 놀랍도다. 한마디로, 예사 코미디 영화가 아니다.
사회적 약자의 도약을 위해 필요한 것
사회적 약자들에겐 기회 자체가 봉쇄돼 있다는 것이 문제다.
그들이 어떤 재능과 능력을 지녔는지 사회는 관심이 없다. 또 실수나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사회구조는 약자를 더욱 고립되게 만든다. 실패는 뭣보다 꿈을 꾸지 않는다. 꿈이 없는 사회는 미래가 없다.
씽씽(주성치)도 그런 면에서 돌연변이다. 소림사 여섯 사제중 한 명인 그는, 쿵푸로 세상을 변화시킬 것을 ‘꿈꾸는’ 몽상가 청년. 그러나 현실에서 그는 쓰레기더미를 나르는 루저. 아무도 초라한 젊은이의 꿈을 믿지 않는다.
그런 그의 꿈에 동반자가 생긴다. 젊은 시절, 페널티킥 실축으로 스타에서 거렁뱅이로 전락한 ‘황금발’. 그 역시 한 번의 실패로 나락으로 떨어진 사회적 약자. 쿵푸와 축구의 접목을 원하는 씽씽에게 황금발은 축구팀을 만들자며 떡밥을 던진다.
꿈꾸는 자는 멈추지 않는다. 현실 속에 침잠한 나머지 소림사 사형과 사제를 찾아 함께 꿈을 찾자고 설득에 설득. 우여곡절 끝에 축구팀이 탄생하지만, 그들이 맞닥뜨려야 할 현실은 살벌하기 그지 없다.
홍콩 영화지만, 그건 우리네 현실과 다르지 않다. 하긴, 이권의 문제에서 어디 자유로운 곳이 얼마나 있으랴. 음모를 통해 탈취한 돈과 권력으로 약자를 깔보고 짓누르면서 자기 잇속만 고스란히 챙겨먹는 축구계의 불한당은 미디어를 조작하고 대중을 농락한다. 버려진 약자들만 고통을 ‘전담’한 채 쓸쓸한 정서를 덮어쓴다.
잠깐 잊지마라. 이 영화, 선전포고 했듯이, 판타지다.
축구라는 판타지를 통해 ‘뒤집기’를 시도한다. 쓸모없다고 내동댕이쳐진 사람들이 무언가를 성취하는 위해 그들만의 리그를 꾸린다. 굴욕을 당해도, 환멸속에 있어도, 그들은 참고 견디면서 있는 놈들에게 똥꼬 깊숙이 똥침을 날린다. 황당해도 짜릿한 쾌감이다.
그 와중에 끼어드는 씽씽과 무이의 로맨스는 가난한 연인들의 자화상이다. 묘한 울림이다. 발가락이 튀어나오는 헌 운동화와 이를 기우는 사랑의 모습. 사랑에도 스펙을 따지는 피도 눈물도 없는 시대, 시대착오적이라는 말을 듣는 한이 있어도, 사랑은 조건으로 짜집기가 되지 않는다. 씽씽과 무이는 알려준다. 눈물젖은 만두와 함께 연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진심’이라고.
판타지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
<소림 축구>를 판타지로 보는 명분은 명확하다. 범접할 수 없는 철통같은 시스템으로 중무장한 현실은 약자 편에 제대로 서 본 적이 없다. 이미 고정된 신분과 계급의 세습은 ‘질서파괴’라는 죄목으로 역전의 드라마를 어지간하면 용납하지 않는다. 다만 구색을 갖추고 전복을 막기 위해, 개구멍 정도만 열어놓고선 ‘세상은 노력하면 이렇듯 살만해’하며 극소수를 받아들일 뿐이다. 선심 쓰는 척 한다.
<소림 축구>가 그런 약자에게 위로를 건네는 방법.
현실에선 뛰어 넘으려다 바지가랭이만 찢어질 일들을 태연자약하게 이뤄낸다. 판타지로서의 면모가 유감없이 발휘되는 순간. 환멸을 참고 견디는 방법. 얼지 마, 죽지 마, 아마도 부활할 거야.
어쩌면 그것이 판타지가 존재하는 이유다. 고단한 일상의 굴레를 잠시나마 잊기 위한 마약과도 같은 영화. 그리고 우리에게 다가왔었던 판타스틱한 축제가 있었다. 지금 누군가에겐 다시 축제가 열렸다. 신나게 외치며 몸을 맡길 것이다. 그리고 꿈꿀 수 있는 자유.
영화의 상영시간이 끝나면, 우리는 고단한 현실 속으로 다시 편입된다. 축제도 그렇게 영원하지 않다. 오르가슴에 도달한 뒤의 허망함을 우린 경험해야 한다. 하루둘 추스리며 생활속으로 편입된 사람살이는 이전과 별 다를 바 없을 것이다. 한판 신명나는 잔치가 ‘있었다’는 과거형의 사실만 뇌리에 박힐 뿐.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일상에 소소한 판타지를 주입하는 것. 혁명이든, 전복이든, 뭣보다 우리의 편협하고 편파적인 취향에 따라 꿈을 꾸는 것. 그리하여, 우리만의 축제를 만들어보는 것. 아마도 높으신 분들은 정치적인 수사를 구사하며 우리의 욕망을 조절하려 할 것이다. 국운융성이니 국격 상승 등의 아리송한 수사를 써가면서. 국가 번영과 국민의 안녕을 걱정하시느라 노심초사하시는 지도자분들의 근엄한 표정따위는 ‘헐리우드 표정연기’로 치부하라.
지금 필요한 건 뭐?
우리의 판타지를 자극하는 우리들만의 축제!
나는 그것이 '혁명'이었으면 좋겠다.
축제 같은 혁명.
좁은 뜻의 권력 주체가 바뀌는 그런 체제 전복적 혁명보다 더 넓은,
혹은 상상력이 가미된 진짜 일상의 혁명.
아, 그런 혁명이 어떤 것일지, 당신과 함께 상상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