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종드 쭌/무비일락

가족괴담) 가족아, 이제 가면을 벗으렴 … <4인용 식탁>

낭만_커피 2007. 7. 30. 22:34
한여름 폭염. 낮에는 열대우림의 정글을 헤치고 다니느라 지치고, 밤에는 열대야의 고통에 휘둘린다. 늘상 여름이면 겪는 일이지만, 꼭 올해만큼 격렬한 때가 없지 싶다. 당장 겪고 있는 열대의 짓눌림이 가장 고통스런 법이다.

이럴 때 필요한 건 뭐? 뭐 수영장도 좋고, 피서도 좋지만. 형편이 안 된다면? 그렇다. 괴담. 무서운 이야기. 빨간 휴지줄까, 파란휴지줄까의 오싹한 스토리텔링. 이른바 납량특집, 공포특급이 필요하단 말씀. 근데 여기저기서 동어반복하는 폐교놀음 말고. 좀더 현실적이고 밀접한 공포를 찾는건 어떤가. 하긴 이 공포는 여름에만 나타날 것도 아니고 평소에도 뒤집어쓰고 사는지도 모르겠다.

한 여름, 가족들이 집안이나 야외에 올망졸망 모여 수박을 햝는 풍경이 낯설진 않겠지? 삼삼오오 모여서 한여름밤의 별을 헤아리는 이 정겨운 풍경. 대개의 경우 '가족'이라는 우산 아래 모여있기 마련이지. 애들도 적당히 끼고.

그런데 이 가족들. 다들 그렇게 평온하기만 할까. 그 풍경에서야 돛자리와 수박만 있으면 되지만, 거기서 벌어지는 괴담들은 없을까? 단 한건의 공포도 발생하지 않을까? 뭐 괜히 그 좋은 자리에 훼방놓자는 건 아니고.^^;  

어제 <4인용 식탁>을 하더라. 2003년 8월에 봤으니 어언 4년이 흐른 영화. 영화가 뭐 걸작이거나, 딱히 좋아서는 아니다. 그저 여름에 적당히 어울리는 가족괴담이랄까. 평상에 수박 놓고 이 영화를 가족들이 함께 보면 각자 어떤 생각이 들까, 하는 궁금함이 일었다. 하긴 그동안 가족을 놓고도 허위와 위선을 드러내고 고정관념을 파괴한 영화나 드라마들도 좀 나왔지. <가족의 탄생>, <좋지 아니한가>, <위기의 주부들>… 아 물론, 그럼에도 따지고보면 가족의 소중함을 되새김질하는 영화들이 더 많을 걸? 모래성 같은 가족의 실상을 끄집어내는 건, 누구나 외면하고 싶은 진실이니까.

일본의 영화인, 기타노 다케시가 그랬다. 이 말, 술자리나 만남의 자리에서 여러번 써먹었는데 대부분 호응을 하더군.^^; "남들이 보지 않으면 몰래 어디론가 내다버리고 싶은 존재가 가족이다."

과연 당신은 어떤가?
가족이라고 다 용서되는건, 너무 식상하지 않아?
그리고 제발, 회사에서 '가족'이라고 말하지 마. 제.발!

가족개념이 약간이나마 변하면서 지금은 좀 약발이 떨어진 이야기지만, 4년 전 <4인용 식탁>을 보고 쓴 글.


“사랑은 믿음을 바탕으로 한다” 혹은 “사랑은 곧 믿음이다”는 명제는 관습적이거나 상투적이다. 그래서 너무 지당하고도 타당한 것 같다(고 인식하게 된다). 어떤 논리가 태클을 걸어도 넘어지지 않을 것 같은 이 명제는 일종의 종교와 같다. 사랑은 그렇게 전제를 깔고서 신화로 등극했고 신성시됐다. “믿어라. 그러면 너희들에게 사랑이 있을 것이다...” 복음을 전파한 주역은 그 잡을 수도, 잡히지도 않는 ‘믿음과 사랑’을 미끼로 쓸 필요가 있었던 어떤 세력이었다.

가족, 역시 사랑이 우선이다. 믿어야 한다. 믿지 못하면 사랑도 아니고 가족도 되지 못한다. 가족의 최초 구성은 엄연히 ‘다른’ 사람들끼리의 결합으로 이뤄진다. 가끔 그들은 믿음이란 명목으로 서로를 옥죄며 스스로 주문을 건다. 사랑과 믿음의 가족. 아~ 거룩할 손, 가족의 신성함이여...

한편으로 이 땅에서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뚜렷하다. 이른바 ‘정상성’에 대한 희구는 단단한 성(城)을 쌓아왔다. 국가나 사회가 (궁핍한)개인을 구제할 수 있는 길이 봉쇄되고 사회안전망의 그물코가 얼기설기 엮인 상황에서 기댈 곳이 가족 말고 어디 있단 말인가. 불안정 속에 내던져진 개인에게 유일한 안전망은 ‘가족’이었다.   

아직도 내가 엄마로 보이니?

(내가 보기엔) <4인용식탁>은 ‘가족괴담’이다. “때론 학교에서 끔찍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여고괴담의 경구에서 학교를 가족으로 바꿔 놓아도 무방하다. ‘사랑과 믿음’으로 똘똘 뭉쳤다는 가족 신화에 대한 도전. 여름괴담 중 하나였던 “아직도 내가 엄마로 보이니?”는 이같은 전조를 드러내기도 했다. 핵가족이 보편화된 시대의 풍경은 ‘4인용식탁’으로 상징된다. 가족과 일상이 묻어나는 풍경. 그러나 <4인용식탁>은 가족에 대한 신화를 거부한다.

신성한 가족의 신화에 칼을 들이댄 시선은 그리 신선하고 새로운 주장은 아니다. 공허하고 차가운 조각난 가족을 담은 리안의 <아이스스톰>이나 허구의 중산층 가정을 다룬 <아메리칸 뷰티> 등에서 가족은 이미 할퀴고 살퀸 상처가 나 있다. 그러나 아직 현실에서 가족은 어떤 테두리 안의 구성원을 묶는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4인용식탁>은 절제의 영화다. 대개의 공포영화가 주는 영상의 과잉은 도드라지지 않는다. 너무 밝지 않은 로(low)키를 써서 배경은 늘 어둡고 영상은 거칠다. 때때로 극 중 전개는 툭툭 끊어진다. 감독은 굳이 설명하지 않고 건너뛴다. 속도감은 느리기 그지없고 일상적인 소음(혹은 음향)은 찢어질 듯 감정의 동선에 따르는 것을 방해한다. 감독은 일부러 그런 전략을 택한 것 같다. 특히 극 중에서 귀신은 맥거핀이다. 원혼을 풀어주거나 복수를 하는 것 따위의 공포는 없다. 주인공들의 고통을 연결해주는 매개일 뿐.

연(전지현)은 정원(박신양)은 물론 다른 사람의 (무의식에 잠재된) 과거를 볼 수 있다. 결혼, 즉 새로운 가족을 꾸릴 준비에 여념이 없는 정원은 갑자기 환상에 시달린다. 약혼녀, 희은(유선)이 마련한 4인용식탁에 두 아이의 주검이 떡하니 나타난 것. 정원은 알 수 없는 불안과 공포를 느끼며 고통스럽다. 우연히 연이 자신이 보는 환상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안 정원은 ‘혼자만의’ 고민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말을 믿어주지 ‘않을’ 것임을 아는 정원에게 연은 구원이다.

당신... 미쳤어...

하지만 연은 그런 정원의 첫 손길을 냉정히 뿌리친다. “당신...미쳤어...”라고. 그건 믿음에 대한 상처를 지닌 연의 자연스런 조건반사다. 연은 다른 사람의 과거를 볼 수 있기 때문에 가까운 사람에게서 멀어진 상처가 있다. 믿음의 붕괴에서 오는 단절은 연의 기면증을 통해 드러난다. 정신적으로 다른 사람의 말과 행동을 인식할 수 있으면서도 몸(육체)은 움직일 수 없는... 멀쩡하다가 픽픽 쓰러지는 연의 행위는 믿음이 얼마나 허약한 기반위에 축조된 것인지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연은 자매보다 더 자매 같다던 이웃집 언니로부터, 일찍 결혼했던 남편으로부터, 시어머니로부터 어떤 믿음도 부여받지 못한다. 고작 할 수 있는 거라곤 정신병원을 찾는 것뿐. 정원이 그녀에게 말한다. “난 당신이 무엇을 말하든, 믿.어.요.” 하지만 전자현미경으로 그 마음을 엿볼 수 있다면 그 믿음을 측정할 수 있을까. 사랑의 믿음도 솔직히 유구한 거짓말(?)을 품고 있다. “나한테는 너밖에 없다” 혹은 “널 영원히 사랑한다”는... 하지만 그 거짓말은 그 순간만큼은 무엇보다 달콤하다. 믿고싶다. 감정이 앞서간다.

연은 정원의 ‘믿음’(으로 가장한 말)을 배반할 수 없다.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다. 그 믿음이 언젠가 흔들리란 것을, 자신이 상처받으리란 것을. 연의 선택은 그래서 하나일 수밖에 없다. 믿음을 기대할 수 없는 관계망 속에서 연이 어떤 문을 통과하리란 것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은 믿는다는 말을 너무 쉽게 한다. 무언가를 얻으려는 목적이 수반되거나 자신을 증명하기 위한 징표로서. 그리고 가족 안에 뿌리를 내린 믿음의 전제도 너무 태연자약하다. 언제든 허물어지기 쉬운 모래성임에도. 연의 기면증 때문에 정원이 호텔로 갔다가 희은에게 그 장면을 들켰을 때, 연을 집에 데려다주고 나오면서 부딪힌 연의 남편이 가지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 관객은 알 수 있다. 물론 관객은 알고 있지만 그들은 알 수 없다. 믿음은 오히려 관객의 것이다. 믿음에 대한 아이러니 혹은 감독의 재치. 

연은 “사람들은 직접 겪었기 때문이 아니라 감당할 수 있을 때만 뭔가를 믿는다”고 전한다. 정원은 먼저 “믿는다”고 말했지만 과거의 기억과 만나고선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음을 실토한다. 믿기 싫다고, 그 믿음은 거짓이었다고. 가족에 대한 믿음을 송두리째 앗아버린 그 어린 날의 기억은 가족의 과거, 현재는 물론 미래에까지 영향을 가한다.

당신, 정말 알고 싶어요?

정원은 자신의 과거를 알려달라고 연에게 조른다. 연은 “당신, 정말 알고 싶어요?”라고 되묻는다. 이 물음 다음에는 (“알고 나면 후회할거에요”)라거나 (“알고 나서 날 믿지 못할 텐데요...”)라는 말이 올 것이다. 잊고 싶은데 잊지 못하는 기억이 있는 반면 잊고 싶지 않은데도 탈색되는 기억이 있다. 망각은 어쩌면 기억할 필요가 없음을 알려주는 신호다.

그럼에도 <4인용식탁>은 뜨거운 수프를 먹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시원한지, 뻐근한지, 아픈지는 뜨거운 걸 일단 삼켜봐야 알 수 있다. 성장 과정에서 베이거나 긁힌 상처와 정면으로 대응하지 않는다면 언젠가 곪아터진다는 것을.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가족도 언제든 칼날을 들이댈 수 있다는 것을. 잔혹 가정사는 그렇게 4인용식탁의 허구를 꼬집는다.  

어쩌면 가족은 미치지 않고는 감당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모래성 같은 믿음을 감당할 수 있을 때만 지탱할 수 있는. 영화를 보며 최근 아이들을 차가운 바닥으로 내던지고 투신자살한 모성의 이야기가 겹쳐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어쩌면 결혼이 미친 짓이듯 가족 역시 그런 것이 아닐까하는, 신화성을 배제한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가 폐부를 콕콕 찔러댄다. 어머니는 아기를 베란다에서 떨어뜨리고, 아이는 밀폐된 우물 속에서 어미의 시체를 뜯어먹는다. 아이는 연탄불을 피워 일가족을 몰살로 이끈다. 

미국에 <제리 스프링거쇼>라는 엽기 TV프로그램이 있다. 여기에는 가족의 개념이 얼마나 허구인지 알려주는 충격적이고 엽기적인 출연자들로 득실거린다. 언니가 동생의 남자친구와 섹스를 하고 둘은 머리칼을 붙잡고 싸운다. 엄마가 딸의 남자친구와 자고선 딸에게 “너보다 사랑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건 현실이다.

‘가족’은 이 사회에서 면죄부이거나 만병통치약인양 남발되거나 오용된다. “또 하나의 가족”이라는 광고카피로 써먹는 쓰리스타그룹의 CF는 한마디로 역겹다. 지깟 것들이 무슨 가족이라고. 보수적이고 고통을 감춘 가족의 안온한 이미지를 기업에 대입, 스스로의 허구성을 감추려는 수작은 지능적이지만 경멸스럽다.

여지껏 몇몇 회사를 거치며 CEO라는 작자들의 주둥이에서 나온 공통적인 말은 정말 우연찮게도 ‘가족’이었다. 어떤 일 앞에서 그들의 논리는 하나다. “우린 가족이잖아...” 우라질, 그들에겐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논의나 합의가 필요 없었다. 가족 앞에 서열과 무조건적인 (아랫사람의) 이해만이 필요했었다. 그들이 정작 필요로 했던 건 가부장적인 질서와 희생이었던 것이다. 그 '가족들‘은 다른 곳에 입양되거나 산산히 흩어지기도 했다.

가족이란 명목으로 더 이상 개인에게 족쇄를 씌우는 건 죄악이다. 신성시되고 신화화된 가족에 의해 개인이 고통 받는 건 불편부당해 뵌다. 고통을 수반한 가족괴담은 이어 ‘바람’이 나거나 다른 항해의 방향을 찾아갈 것이다. 개인도 이에 따라 무소의 뿔처럼 혼자 가면서 가족과 또 다른 싸움을 벌여야 하리라. 가족괴담은 언제든 물을 것이다. ‘우리가 정말 서로를 믿고 사랑했을까’라고... (2003.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