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종드 쭌/무비일락

생각하는 직장인의 태도 혹은, 노예 아닌 인간이 되기 위한 자세

낭만_커피 2010. 4. 3. 21:24

생각하는 직장인의 태도 혹은, 노예 아닌 인간이 되기 위한 자세

[리뷰] <그린존>



21세기라고 다르지 않음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혹시나 달라지지 않겠느냐는 기대는, 역시나. 그렇다. 전쟁 말이다. 9.11이나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라는 큰 야만을 들이대지 않아도 된다. 지금 여기의 우리는, 천안함 침몰에서 끊임없이 ‘전쟁’을 끌어들이는 세력의 선동을 목격하고 있다. 준전시상태, 맞는 말이다. 더구나, 전쟁과 시장. 이름만 다를 뿐, 거의 비슷한 속성을 지닌 체제의 속살을 감안한다면 말이다.


“그런데 냉전도 사실상의 전쟁이라 볼 수 있기 때문에, 한국 사회의 냉전 체제는 국가보안법이라는 이름 아래 다수의 정치적 반대자를 ‘빨갱이’로 덧칠하여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완전히 매장시킬 수 있는 체제다. 냉전 체제는 노동조합이나 시민단체조차 국가의 적으로 모는 자본 독재 체제다. 선거에 의한 정권 교체와 제도로서의 민주주의는 작동하더라도, 매카시즘이라는 유령은 여전히 살아 있으며, 반공과 국가 안보의 폭력과 고문, 국정원․기무사․검찰․경찰 등 수사기관의 권력화, 이들 정보기관이 지목하는 내부의 적에 대한 일상적인 사찰과 감시가 지속되는 체제다.”(《리영희 프리즘》, p.73)


오늘, 제주 4.3항쟁 62년을 맞은 날. 역시나 전쟁의 흔적을 아로새긴다. “전쟁은 끝났다”고 선언할 만큼 평화와 인권이 찾아왔냐고 묻는다면, 도리도리. 매일 같이 전쟁터나 다름없는 일상을 맞닥뜨리는 우리들이다. 스크린이라고 다르지 않다. <그린존>도 그 중의 하나다. 본시리즈로 새로운 액션을 선보인 폴 그린그래스 감독과 맷 데이먼이 만난 전쟁의 기억.


<그린존>, WMD사기극의 재구성


<그린존>은 줄곧 한 단어를 끄집어낸다. WMD(Weapons of Mass Destruction). 대량살상무기. 2003년 무렵부터 끊임없이 들어온 익숙한 이 말은, 이미 유효기간이 지났지만, 아니 효력을 잃었음에도, 관객을 전쟁의 한복판으로 끌어간다. WMD라는 말 하나로, 전세계를 상대로 거대한 사기를 친 부시행정부의 그 협잡극 말이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그 협작극의 숨겨진 진실을 찾거나, 전쟁의 의미를 되새김질하게 만드는 것만은 아니다. 이미 사기로 밝혀진 마당에, 숨겨진 진실 따위가 다 무언가. “전쟁은 언제나 단순한 군사적인 사건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권력 현상이며 정치적인 사건이다.”(《리영희 프리즘》, p.63) 감독도 말하지 않았던가. “<그린존>은 이라크 전쟁에 대한 영화가 아니다. 이라크에서 벌어지는 스릴러다.” 영화를 보러 간 많은 관객들도 아마, 액션 혹은 스릴러로서의 쾌감에 더 집중했을 것이다.


영화는 그 기대만큼 빠르고, 현란하다. 폴 그린그래스와 맷 데이먼 조합에서 많은 이들이 떠올리는 건, 본 시리즈일 테고, 영화는 그런 시각적 긴장감과 속도감으로 가득하다. 2003년 3월20일(한국 시각)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시작한 날부터 영화가 시작되고, WMD를 재잘대도 스크린속의 전장은 어디까지나, 액션활극이나 스릴러로 치환될 뿐이다. 생생하게 전장을 묘사할수록, 그것은 휘황한 스펙터클일 뿐, 눈앞의 현실로 전쟁을 체험시키진 않는다. 아마도 부시행정부가 꾸민 사기협잡극의 재구성 정도?


생각하는 직장인의 표상, 로이 밀러

 

다만, 내가 본 <그린존>에 대해 좀 더 말하자면, 이는 한마디로 ‘직장활극’이다. 맷 데이먼이 연기한 로이 밀러는 충직한 직장인, 그 자체. 말하자면, FM (직업)군인이다. 우리가 아는 군인의 임무에 그는 한 치의 오차도 없다. 대량살상무기팀의 팀장으로서, 이라크가 숨겨놓은 WMD를 찾아내는 명령을 받고 복무한다. “무기를 찾아 사람들을 구해야죠.” 군인으로서의 사명감과 복무정신이 드러난 대사만 봐도 그렇다. 



그런 그를 희롱(?)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전쟁이다. 아니, 앞서 언급한 전쟁의 본질에서 엿볼 수 있듯, 권력 현상이며 정치적인 사건이다. ‘믿을만한’ 제보자의 말에 따라, 그의 팀은 몇 차례 수색에 나섰지만, 웬걸. 있다는 WMD는 없고 허름한 변기공장이나 공터만 덩그러니. 아니 변기공장에서 분출한 암모니아(!)가, 살상용 화학무기라는 거냐! 분통이 터질 수밖에. 전쟁으로부터 사람들을 구해내고픈 충직한 군인에게, 자꾸 허탕만 치게 만들다니.


의심 혹은 의혹은 당연하다. 회사(군대)에서 하달한 명령에 따라 충직한 직장인(군인)의 임무를 다하고 싶었건만, 이거 뭐가 잘못된 거지? ‘직장인’ 밀러가 돋보이는 것은, 생각하는 존재라는 점이다. 이 엄혹졸렬한 시대. 직장에 붙어있기만 해도 감지덕지지, 생각은 무슨 생각, 이라고 반박한다면, 할 말은 없다. 직장(의 명령)을 신성한 것으로만 여기고, 특히 군대의 특수성을 들어, 그 명령이 신성하다고만 말한다면, 굳이 당신을 인간으로 취급하진 않겠다. 조건반사의 토끼나 파블로프의 개이거나 그저, 노예일 터이니. 아마도 그렇다면, 신성한 것에 의심하는 것은 ‘죄’가 될 터이고, 복종만이 남아있겠지.


그러나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거칠게 말하자면, 인간의 기본 전제가 아니던가. 18세기 프랑스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마르퀴 드 콩도르세는 인간을, 생각하는 자와 믿는 자로 나눴다. 인간에 대한 두 계급. 주장(생각)하는 계급, 즉 주인계급과 그 주장을 믿는 계급, 노예 계급으로. 과연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지배세력이 강제 주입한 의식을 내면화한 ‘믿는 노예’와 ‘생각하는 인간’.


충직한 직장인 로이는, 선택한다. ‘생각하는 인간’으로, 생각하는 직장인(군인)으로. 어쩌면 그것은 군인이라는 직업에 충실하기 위한 선택이다. 직접 단서를 찾아 나서는 로이. 왜 믿을만하다는 일급정보가, 왜 자꾸 삑살이가 나는지, 그는 궁금하다. 그의 일부 부하는, (군인이) 명령에만 따르면 되지, 왜 나서냐고, 반문하지만, 그는 투철한 직업정신을 가진 생각하는 직장인이다. 덕분에, 꿍꿍이 많은 국방부 간부 파운드스톤(그렉 키니어)이 제동을 걸지만, 그에게 더 중요한 것은 상사가 아니고, 직업(의 임무)이다.


그러니 단지 생존만을 위해 직장에 흡착해야 한다는 말은, 비겁한 변명이다. 직장 없는 설움과 비굴함을 강요하는 더러운 세상이지만, 실재 ‘전장’이라는 무자비한 곳에 있는 로이도 생각을 하고 행동에 옮긴다. 내가 본 <그린존>은, 기자들마저 정부의 농간에 놀아나고 있는 현실도 꼬집지만, 생각하는 직장인이 무엇인지, ‘개념’을 심어줬다. 여전히, 미궁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천안함 침몰사태와 거듭되는 반도체 공장의 의문사(!)와 악어의 눈물을 흩뿌리다 위기를 들먹이며 다시 제왕 자리에 복귀한 작자(‘이거(뭐)뉘’하는 어처구니없음과 ‘돈 거뉘’하는 의구심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에게 아무 말 않고 복종하는 주류 미디어와 별셋 임직원의 모습을 지닌 우리네 풍경이 참으로 씁쓸하다.


리영희는, 인간의 반대말, 부정을 ‘노예’라고 일컬었다. 생각하는 것이 자유를 가져오며, 자유가 인간의 전부라고도 했다. 노예로부터 벗어나 자유인이 되는 것, 그것이 곧 인간이다. 수백 만 유태인 학살의 주범인 아이히만도 집에선 아내와 자식을 아끼고 사랑했고, 상부의 명령에만 복종하는 직장인(노예)이었다. 이를 보고 ‘악의 평범성’을 들먹인 한나 아렌트는 그랬다. 인간에게 사유는 능력이 아닌 ‘의무’라고. 충직해야 할 것은 상부나 상사의 명령이 아니라, 직장이나 직업이며, 인간으로서 의무를 다할 때 우리는 노예가 아닐 수 있다.


가장 보통의 직장인, 아니 어쩌면 보통보다 약간 못한 직장인으로서, <그린존>은 그런 영화였다. 지금 여기의 직장인들, 특히 입 닫고 묵묵히 있는 천안함 관련 국방부 관계자들이나 삼성 임직원에게 강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