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뮈에게 커피란?
엄마가 죽었다.
전보가 그렇게 왔다. 내 탓은 아니지만, 가지 않을 수 있나. 사장은 좋아하지 않는 눈치였지만, 휴가를 내고 버스를 탄다. 피곤했을까. 계속 잠을 잔다. 도착해선 엄마의 시신도 보지 않는다. 눈물? 글쎄, 눈물샘이 마른 건가. 엄마의 주검이 담긴 관. 경비가 커피를 권한다. 홀짝. 커피엔 역시나 담배. 그래도 엄마 시신 앞인데... 잠깐 망설인다. 그렇다고 꺼릴 이유도 분명치 않다. 담배 한 모금. 후~ 커피가 담배를 부른 것인지, 담배를 피우기에 앞서 커피를 애피타이저로 마신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맞다. 뫼르소다. ≪이방인≫
커피, 태양, 담배, 바다, 정사... 그리고 숱하게 명명된, 그래서 지겨울 법한 부조리. ≪이방인≫을 떠올리자면, 그렇다. 태양이 너무 강렬해서 살인을 저질렀다는, (문학)역사상 가장 병맛(!)스러운 살인의 이유를 들이댄 뫼르소. 다양한 병맛짓으로 그야말로 인생사 병맛을 실감케 한 재능은, 온전히 그에게서 나왔다.
그렇다. 그, 알베르 카뮈.
그는 커피 한 잔과 함께(물론 담배도 곁들여서) ≪이방인≫을, 뫼르소의 병맛짓을 휘적거렸다. 빠뤼의 골목, 생제르맹 거리에 위치한 ‘레 되 마고·Les Deux Magots(2개의 도자기 인형)’와 ‘드 플로르·de Flore’에서였다. 생제르맹 교회 앞 광장에 위치한 카페들.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카뮈는 담배를 뻑뻑 피워가며 커피의 힘을 빌어가며, 뫼르소를 탄생시켰다. 부조리의 탄생. 커피로 조리한 부조리? 물론, 이곳엔 카뮈와 한때 절친이었던 사르트르를 비롯해 보부아르, 랭보, 베를렌, 알퐁스 도데, 앙드레 지드, 헤밍웨이, 피카소 등 내로라하는 문인·사상가·철학자·예술가 등이 즐겨찾았다. 오죽하면 "집으로 삼았다"는 얘기(사르트르)까지 나왔겠나. 지금은 관광객들이 호기심으로 머무는 장소가 됐다지만.
카뮈는 반항아.
저 포스를 보라. 반항 아니면 죽음을. 그는 부조리에서 세 가지 귀결을 이끌어낸다고 했다. 반항, 자유, 열정. 자유주의자이자 사회주의자였던 그를 오해하는, 아니 그를 이용해 먹은 한국의 지배세력의 유언비어도 있었다. 스탈린주의에 반대했던 그를, 반공주의자로 끼워맞춘. 말하자면 반스탈린주의적 사회주의, 반전체주의적 사회주의에 가까웠다(고 나는 알고 있다). 폭력에 근간한 정복자의 모습을 한 절대주의적인 이데올로기에 대한 두드러기. 부조리에 반항하되, 반항의 기원을 잊지 말아라!
커피가 카뮈를 꼬드겼다.
약간 과장하자면, 커피 없이 ≪이방인≫이 나왔을까. 다른 판본으로 말하자면, 그의 지성을 자극한 것은 커피였다(고 생각한다). 그 어느 커피하우스에선, 또 다른 카뮈가 담배 한 모금과 함께 커피의 힘을 빌어 지금의 부조리를 끄집어내고 있을지도 모를 일. 1959년 한 인터뷰에서 "내 나이 마흔다섯, 아직 놀랄 정도로 활력이 남아 있습니다"라고 자신만만하던 카뮈는 이듬해 초, 소설(≪최초의 인간≫) 원고를 품고 가다가 차에 치여 아듀. 요절이었다. 커피가 그를 죽인 것은 아니었다. "나는 가난 속에서 자유를 배웠다"고 말한 이의 부조리한 죽음.
그런데 왜 카뮈?
시간을 빼내질 못해서 지난 4일 그의 이야기를 못하고 지나갔다. 그러니까, 지난 4일은 카뮈의 50주기. ≪이방인≫을 언급하기엔 나의 내공이나 공력이 너무 얕고. 커피와 카뮈는 어떤 관계였는가 정도로만. 그나저나, 저 포스, 저 간지. 아주 부러워 죽어죽어. 저 정도 간지라면, 여자들에겐 축복 아니었겠나. 한 여자보다 여러 여자와 관계를 맺어야 했던 부조리한 이유? 뭐, 농담이고, 50주기를 맞아 드디어 나온 카뮈 전집, 소장하고 싶다. 꿀꺽.
☞ 다시 아파온다…카뮈가 겨눈 ‘진실의 화살’
참, 늦었지만 시즌1, 접.었.다. 가슴이............ 쫌 아프다. 다시 얘기하자. 지금은 시즌2다.
마지막으로, 카뮈 따윈 몰라. 영화 제목이다. 일본 영화. 카뮈 무덤은 안 옮겼으면 좋겠다. 우파 정부 따위, 반항하는 게 카뮈 답지 않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