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통 어리석음의 기록

막장에서도 빛은 발산되고 꽃은 피나니, 뮤지컬 <렌트>

낭만_커피 2009. 4. 20. 16:18

음습하고 칙칙하며, 어둡다. 빛이라곤 평생 틈새라도 열고 들어오지 않을 것 같이 꽉 막힌 공간이다. 그것은 세상과의 단절을 의미한다. 이른바 ‘어둠의 자식’들이 암약하는 곳이다. 그 자식들은 세상 밖으로 밀려난 존재들. 마약을 하고, 동성애를 하거나, 성 전환을 하기도 했다. AIDS 바이러스 보균자까지. 아니, 취급부주의 품목을 경고하는 것도 아니고, 이게 웬 막장인생들의 나열? 이냐고 불평할 수도 있겠다.


그러니, 이건 일종의 경고다. 뭐, 꽃 같이 아름다운 것들만 보고, 순수한 것만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에겐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일 수 있으니, 관람을 제한하는 것이 좋겠다. 


뮤지컬 <렌트>는 그렇게 막장(?)에서 시작한다. 세상 끝으로 밀린 어떤 청춘들의 발악(!)같은 몸짓. 막장이라, 어둡다고? 천만에. 정작 <렌트>는 빛보다 더 뜨거운 에너지가 있다. 그건, 놀랍지 않다. 밝은 곳에서의 빛은 묻히고 만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존재야말로 꼭 필요한 것이 아니던가.


알다시피, 이 세상은 대체로 어둡다. 밝다는 건, 새빨간 거짓말. 이 세계가 얼마나 어둡고 음침한지는, 당장 눈앞의 신문만 펼쳐도, 방송만 틀어도 빤~하다. 전쟁의 포화로 상처 입고 피 흘리는 아이들의 모습이 스펙터클처럼 펼쳐진다. 화폐 아니면 가치 따윈 없는 양, ‘대박’은 쉴 새 없이 입을 오르내린다. 삽질을 향한 욕망은 또 왜 그렇게 강한지. 정부의 정책이라는 것은 온통 부자들을 위한 것뿐이다. 살다보니, 알겠더라. 이 땅은 부자들의 나라지, 서민 혹은 시민을 위한 나라는 아니라는 사실.


그런데 <렌트>가 왜 그런 거대한 힘을 조롱하느냐고?

그래, 그 이야기를 따라가 보자.


<렌트>, 그 탄생의 비화

올해 여섯 번째 공연(1월9일~2월8일)을 시작했다. 한국에서 <렌트>는 2000년 초연 이래 탈을 바꿔 쓰면서 관객과 만나고 있다. 오리지널 <렌트>의 시작은 1996년 1월 오프브로드웨이에서였다. 계보를 보자면, 뿌리는 프랑스 작가 뮈르제가 쓴 《보헤미안 삶의 풍경》이다. 이를 토대로 오페라로 올린 것이 푸치니의 <라 보엠>. 조나단 라슨은 ‘보헤미안’을 열쇳말로 <렌트>를 꾸렸다. 시인을 예술가로 바꾸고 무대를 뉴욕으로 옮겼다.


시기는 1989년, 레이건이 조장한 신보수주의가 창궐하던 때. 기득권과 위정자가 내세우는 자유주의의 이면에는 통제와 억압, 차별과 편견이 있었다. 라슨은 그게 숨 막혔고, 7년 동안 <렌트>에 모든 것을 쏟아 각본을 썼고 무대로 올리기로 했다. 마침내 오프브로드웨이 초연을 하루 앞둔 1월25일, 그러나 라슨은 정말 드라마틱하게 36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대동맥혈전이었다.


이런 극적인 이야기를 담은 <렌트>는 초장부터 흥행에 불을 붙였다. 150석에서 시작된 <렌트>는 뜨거운 에너지를 품고 4월에 브로드웨이 중심가로 옮겼다. 당시, <렌트>는 새로웠다. 위선적이지만 안정을 갈구했던 중산층 정서를 내던진 뮤지컬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뮤지컬로서는 보기 힘든 반사회적인 소재. 영화와 달리 소재 등에서 뮤지컬은 보수적이었다. 가족 단위의 관람으로 흥겹고 휴머니티가 가미돼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 마당에 다양한 인종은 물론이요, 소외계층 인종을 주연으로 기용하는 파격(!)까지 감행한 <렌트>는 엄청난 화제를 몰면서 2008년 9월7일까지 브로드웨이에서 공연됐다. 13년을 넘은 세월. 브로드웨이 역사상 일곱 번째로 오래 공연된 작품으로 남았다.




가난한 예술가와 군상이 꾸리는 난장

<렌트>는 국내에서도 환대를 받았다. 남경주, 조승우 등 톱뮤지컬 배우들이 남주인공 ‘로저’를 맡았다. 그러나 이번 공연은 거의 신예들로 채워졌다. 톱스타의 캐스팅 없이(그나마 그룹 ‘쥬얼리’ 출신의 조민아가 여주인공 ‘미미’를 맡았다는 정도). 이야기는 변함없이 전개됐다. 기존의 ‘정상적’ 가치에 별반 관심이 없는 가난한 예술가와 군상이 꾸리는 난장.


그들은 각자의 예술 활동을 영위하면서 때론 즐겁지만, 그것은 외줄타기 같이 위태위태하다. 뮤지션 로저(유승현)는 에이즈로 영혼이 잠식되고 있고, 마크는 카메라를 늘 품고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담고 있지만, 언제 영화를 찍게 될지는 깜깜하다. 미미(조민아)도 스트립댄서로 마약쟁이에 에이즈 보균자다. 컴퓨터 천재 콜린(최재림)은 거리에서 강도에게 맞은 뒤 거리의 드러머인 여장남자 엔젤(이지송)의 도움을 받으면서 눈이 맞는다.


가난하지만 연대할 줄 아는 그들을 괴롭히는 건 건물주 베니. 가난과 에이즈, 동성애 등 사회가 품어야 하지만 불편해하는 가치들. 자본주의 사회 뒷골목에 내동댕이쳐진 생의 단면이다. 한편으로 위정자들이 감추고 뿌리 뽑고 싶지만, 감출 수 없는 현실.


그러나 종종 드러나는 삐걱거림이 극에 대한 몰입을 방해했다. 신예들로 풋풋한 기운을 드러낸 것은 좋았으나, 그것이 또한 보헤미안의 흔들림을 표현하기에 더 적합할지도 모르겠으나, 로저와 미미 두 축이 흔들리는 것은 해결해야 할 문제로 보인다. 이른바 ‘삑살이’로 표현될 수 있는 미끄러짐이 종종 드러났다. 열정적인 연기는 별개로 뮤지컬에서 몸과 소리의 기운이 제대로 합일되지 못하는 것은 관객모독이 될 수 있다. 음정이 미끄러지거나 리듬의 탄력이 떨어지면서 극이 느슨해지는 경험은 뮤지컬로선 치명적이다.


전체 이야기의 중심인 로저와 미미가 상대적으로 빈약해 보이는 것도 극복해야 할 과제다. 엔젤과 모린(최혜진)은 가장 빛났다. 캐릭터 자체도 매력적인데 그 역을 소화하는 능력도 뛰어났다. 죽음에 도달하는 엔젤의 연기는 콜린의 애절한 노래와 함께 눈물을 쏟아내기에 충분했다. ‘음메~’로 대변할 수 있는 모린의 퍼모먼스도 인상 깊었다. 조연들의 연기가 빛이 난 것은 좋으나, 주연들이 살아나지 못함으로써 극은 다소 불균형하게 전개됐다. 배우 간 연기 편차를 조정하지 못한 것은 연출의 오점이 될 수 있다. 




<렌트>가 상기시키는 지금-여기의 어떤 살풍경

<렌트>는 일종의 기시감을 불러 일으켰다. 전 세계적인 경제위기와 맞물려 이에 맞서 현실을 살아가는 어떤 사람들의 몸부림. 초연 당시의 <렌트>는 권력에 대한 저항이자 조롱이었다. 범죄와 전쟁한답시고 부동산 값을 올려대고 예술을 압사한 줄리아니 시장에 대한. 부자를 위한 도시로 꾸미려는 행정에 대한 반발.


부자를 위한 나라를 만들려는 어느 국가의 풍경과도 겹칠 수밖에 없다. 그 국가는 보수 정도가 아닌 반동을 품고 파시즘으로 회귀하는 기운까지 보이고 있다. 부자, 정규직, 비장애인, 남자, 내국인과 같은 기득권자의 목소리와 처지에만 신경을 쏟을 뿐, 정작 관심이 필요한 분야엔 귀를 막고 있는 양상이다.


그들은 다르거나 불순한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힘이 없는 것은 대놓고 무시한다. 다르거나 불순한 것, 그리고 힘이 없는 것을 보듬었고, 그래서 환호성을 받았던 <렌트>와는 다른 모습이다. 권력은 저절로 변하지 않음을 감안한다면, 우리의 예술이 들려주는 어떤 목소리에 더욱 귀를 기울이는 시절이 돼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물론 오리지널 <렌트>가 가졌던 힘을 지금 목도할 수는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앞의 <렌트>는 번역이 아닌 의역이나 각색이 돼야 하기 때문이다. 그저 나는 그것이 아쉬웠다. 


그래서 나는 “에이즈에 걸려도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다”고 노래한 <렌트>의 한 메시지를 “가난해도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다”로 바꾸고 싶었다. 에이즈가 천형이나 죽을 병이 아닌 것으로 차츰 인식전환 되는 것처럼, ‘가난은 나라도 구제하지 못한다’는 변명은 지금의 경제위기를 거치면서 전환돼야 할 과제다. 가난은 사회구조적인 문제다. 결코 개인의 문제로 치부될 것이 아니다. 부를 쌓은 것 또한 이 사회가 만들어준 것이지, 개인이 잘나서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임을.


어쩌면 지금-여기의 우리에게도 치열한 논쟁과 열광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오리지널 <렌트>가 당대의 지배적 시선에서 벗어난 화두를 던짐으로써 논쟁과 열광을 동시에 몰고 다니면서 사회의 지배적 시선에 금이 가게 만들었던 것처럼 말이다.


아쉬운 점은 그거다. 우리가 <렌트>를 보면서도 ‘렌트헤드’(Rent Head)가 탄생되지 않는다는 것. 그만큼 오리지널 <렌트>가 품은 에너지를 우리 식으로 각색하지 못한 이유일 수도 있겠다.


어쨌든 현실의 고난을 질료로 삼아야 한다고 <렌트>는 넌지시 화두를 던진다. 고난은 세상에 머무는 대가로 렌트해야 하는 것으로 삼고, “우리에겐 오직 오늘뿐!(No Day But Today)”이라며 버티고 견디는 것이 지금-여기의 우리에게 던져진 과제임을. 비록 그 ‘오늘’이 한물 간 클리셰(상투어)처럼 들리더라도 말이다. 52만5600분(1년을 ‘분’으로 계산한 시간) 제대로 활용하기. ‘52만5600분의 4년 남짓한 시간’ 또한 견뎌내기.  



참, 이 작품은 영화로도 제작됐다. <나홀로 집에>의 크리스 콜럼버스 감독이 2005년 동명으로 연출한 이 영화는 국내에서 2007년 개봉한 바 있다. 뮤지컬만큼 좋은 평가를 얻지는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