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애 최고의 만화라고 말, 분명 못한다. 하지만, 내 생애 이만큼 복잡하지만 흥미진진한 플롯의 작품은 흔치 않았다. 우라사와 나오키 작가의 《20세기 소년》 얘기다.
우라사와 작가의 《몬스터》에 대책없이 풍덩 빠졌던 나는, 《20세기 소년》에도 어쩔 수 없이 흡입되고 말았다.^^;
언제부터였는지 확실치 않지만, 《20세기 소년》을 내 서재에 채워넣기 시작했고, 찔끔찔끔 나오는 20세기 소년을 기다리는 일이, 나의 일상 중 하나가 되고 말았던 적이 있다.
그리고 도저히 영화화가 불가능하리라 여겨졌던, 《20세기 소년》이 영화로 만들어진단다. 기다렸다. 그 엄청난 예언의 스펙터클을 스크린을 통해 만나는 일을.
그 오랜 기다림의 끝, 마침내, 《20세기 소년》이 스크린에 도달했다. 3부작으로 관객을 만나게 된 《20세기 소년》. 1부가 2008년 9월11일, 개봉박두.
원작(만화)을 그대로 스크린에 이식(카피)한 탓인지, "원작에 지나치게 충실한 각객"(김봉석) "힘겨워 보이는 각색, 터질 것 같은 스크린"(김혜리) "속편에 대한 기대감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 밍숭맹숭한 결과물"(김종철) 등의 평을 듣고 있는 <20세기 소년:제1장 강림>이지만,
뭐 어때. 나는야, <20세기 소년>을 기둘리는 21세기 키덜트 아니던가. 고로, 현재의 내 심정은, 이렇다. 두근두근 쿵쿵. 당신과 함께, <20세기 소년>을 만나고 싶다. 참고로, 원작(만화)를 꼭 보라. 당신을 향한 나의 강추작!
아래는, 지난 2년 전, 당시 동료였던 배성준님의 도움으로, <괴물>의 봉준호 감독과 우라사와 나오키 작가의 대담을 정리했던 글. 이 대담의 정리를 제의받으며, 가슴 설렜던 한줌의 기억. ^^ 두 몬스터(괴물)의 만남.
음, 그래도 사실 나는 우라사와 작가의 작품 중에, 《20세기 소년》보다 《몬스터》를 더 좋아한다. 2년 전, 《몬스터》의 영화화 또한 진행 중이라고 들었는데, 언제쯤 스크린에 도달하시려나. 아, 보고 싶다.^^ ==================================
<괴물>의 봉준호, <20세기 소년> <몬스터>의 우라사와 나오키를 만나다
두 ‘괴물’이 만난 현장을 훔쳐봤다. 한일 양국에서 매체형식은 다르지만, 각자 영역에서 최고 수준에 올라있고, ‘괴물’(몬스터)이라는 작품을 갖고 있는 창작자들. 관객 1000만에 도달한 영화 <괴물>의 봉준호 감독과 일본의 국민작가로 인정받으면서 전세계에 팬을 갖고 있는 <몬스터>의 우라사와 나오키 작가의 만남. 다르게 말해보자면, 이 현장은 1000만 관객(<괴물>의 현재까지 관객동원)과 2500만 독자(<몬스터>의 일본 내 판매부수)의 만남이다. 이 얼마나 가슴 뛰는 일인가. 두 사람의 팬이라면, 이 ‘괴물’들의 충돌이, 그들이 뿜어내는 에네르기의 향연에 므흣해 질 일이다.
두 사람의 만남은 지난달 31일 일본의 한 호텔에서 이뤄졌다. 일부 매체들에서 두 사람의 만남이 보도된 바도 있다. 동영상을 통해 시종일관 화기애애하게 진행되는 이들의 대담 모습을 보자면, 단순히 한일 양국의 문화인들의 만남 혹은 영화와 만화의 교류, 그 이상의 포스를 뿜어낸다.
<괴물> 봉준호 감독과 <20세기 소년> 우라사와 나오키 작가의 만남. 봉 감독님 표정이 웃기다
관객 천만돌파의 이정표를 세운 봉준호 감독은 고백한다. 자신의 작품 세계에 우라사와 나오키 작가의 작품들이 자양분이 됐음을. 지금까지 세편의 장편영화를 찍으면서 늘 함께했던 만화가 우라사와 작가의 <해피> <몬스터> <20세기 소년>이다. 실제 과거 기사를 보면 봉 감독의 시나리오 작업실엔 우라사와 작가의 <몬스터> <20세기 소년> 등이 책장을 칸칸 메우고 있다고 했다.
세기의 작가, 우라사와 나오키
혹자에겐 생소할 수도 있겠으니 ‘우라사와 나오키’를 잠깐 언급하고 가자. 사실 뭐 어떻게 하든 이 불완전한 텍스트로 그를 설명하는 건 불가능하다.^.-;; 치밀하고 정교하게 잘 짜인 그의 세계는 재미도 재미지만, 무엇보다 ‘인간’에 대한 사유를 가능케 한다. 선과 악의 대결을 전제하지만, 일방적으로 상황을 몰고 가지 않는다. 캐릭터들은 너무도 생생하며 그들의 고뇌는 너무도 ‘인간적’이다. 현실 그리고 인간에 쫀득쫀득 밀착한 느낌.
만화 <몬스터> 표지
그의 대표작 <몬스터>는 독일을 배경으로 전도유망했던 일본인 의사 ‘덴마’가 총탄을 맞고 죽어가는 한 소년(요한)을 구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근데 알고 보니 그 소년은 냉전시대가 만든 ‘몬스터’! 허걱. 의사로서의 사명을 다하고자 구한 소년이 연쇄살인마라니... 딜레마에 빠진 덴마가 모든 명예와 지위를 버리고 요한을 잡기 위해 뛰어든 이야기가 <몬스터>다. 인간의 악마성과 음모를 파헤치는 이 이야기에는 재미 이상의 철학과 사고가 담겨 있고 그것을 요구한다. 물론 단순히 재미만 놓고 봐도 무방하다.^.^
1995년 연재를 시작한 <몬스터>는 7년 만인 2002년 2월 18권으로 완간됐고 TV애니메이션 시리즈로도 제작돼 국내서도 투니버스에서 방영된 바 있다. 현재도 재방 요청이 게시판을 통해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 더구나 연재 중인 작품으로는 최초로 지난 1999년 우라사와는 ‘데즈카 오사무 문화상’을 탔다. 이 상은 <철완 아톰>을 창조한 일본 만화계의 거장 데즈카 오사무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만든 것이다. 당시 심사위원들은 기존 만화에서 볼 수 없었던 풍부하고 높은 기량을 느낄 수 있었다는 것을 수상작 선정 이유로 꼽았다고 한다.
<몬스터>는 또 할리우드에서 영화화할 예정이다. 복잡하고 장대한 스케일과 치밀하고 심오한 구성을 영화화하기엔 불가능하지 않겠느냐는 우려도 있지만, 미국 뉴라인시네마가 일단 판권을 획득한 상태다. 제발이지, 원작의 아우라와 철학을 훼손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알지? ^^;;
사실 만화를 조금이라도 알고, 그의 만화를 본 사람들에겐 우라사와는 ‘과장해서’ 신적인 존재다. ‘천재’라는 칭송이 전혀 아깝지 않은 그다. 존경과 경배의 고해성사를 내뱉은 이들도 부지기수다. 혹자는 그의 작품을 통해 ‘만화’에 대한 편견을 버리게 됐다는 고백도 했더랬다. 그의 작품은 재밌는 무협소설처럼 한번 잡으면 놓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한 흡입력을 자랑하기도 한다. 그래서 그는 ‘늪’이다.
‘소봉’이라는 블로거는 이렇게 말했다. “개인적으로는 만화를 영화를 뛰어넘는 예술의 경지에 올려놓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대중성이 없느냐하면 그렇지도 않다. 그의 만화는 언제나 인기 차트 상위에 랭크되니까... 언제나 그의 이름을 걸고 나오는 만화는 기대되기 마련이다.”
만화 <20세기 소년> 표지
나도 어설프게 이에 동참하자면, 그와 동시대에 살고 그의 작품을 보는 건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와 대화를 나눌 때, 우라사와 혹은 <몬스터>, <20세기 소년>을 들먹이면 나는 가슴이 뛴다. 그 사람이 괜히 다르게 보인다. 그렇게 <몬스터>나 <20세기 소년>은 만화 그 이상의 만화(라고 생각한다).
이후 우라사와 작품으로 지구를 지키는 켄지와 그 일당의 이야기를 다룬 <20세기 소년>은 현재 22권 마지막 권의 출간을 앞두고 있다. 이 역시 독자들의 폭발적인 호응을 받으며 우라사와의 내공과 포스를 보여줬다. 현재 21권까지 산 나는 눈빠지게 22권 발간을 손꼽아 기둘리고 있다. 2부 이야기도 나오고 있는데 일단 22권부터 볼 일이다. 한편 2003년부터 연재한 <플루토>는 2005년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받기도 했다.
봉준호와 우라사와 나오키의 접점
‘20세기 소년’들로서 ‘플란다스의 개’를 기억하고 있을 이들의 접점은 무엇일까. 그들은 각자 분야에서 ‘몬스터’ 혹은 ‘괴물’같은 작가이자, 연쇄살인범에 의한 ‘살인의 추억’을 다룬 작품을 갖고 있다.
우라사와 작가에게 자신이 그린 스토리보드를 보여주고 있는 봉 감독 ^^
대담에서도 두 사람은 서로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고 교감하고 있다고 얘기한다. 우라사와는 “괴물을 보고 기본적으로 생각이 똑같다고 생각을 했다”고 말하고, 봉준호는 “생생한 디테일이나 감성들이 너무 잘 통해서 놀랐다”고 토로한다. 특히 두 사람의 작품에서 나오는 먹는다는 것, 사람살이에서 가장 중요한 이 문제에 포함된 함의는 단순히 먹는 것 이상이다.
그리고 어쩌면 소시민들, 약자들에 대한 공통분모. 우라사와는 <몬스터>를 ‘내 자신 자체의 세계’라고 인정했다고 한다. 복잡하고 미묘한 그리고 쉽게 선악의 구분이 불가능한, 그런 이야기를 뜻한 것일까.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가 생각해보면 그것은 항상 사회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 같아요. ‘정의’란 무엇인가 라는 것도 역시 시대 상황이나 배경에 따라서 규정되는 것이 아닌가 해요. 그런 면에서 ‘보편적 정의’를 찾기 위해 항상 생각하고 사는 것 같아요.” 대담에서 우라사와는 이렇게 말했다.
<몬스터>에는 군국주의와 냉전시대, 그리고 거대한 권력과 경찰로 대변되는 공권력이 나온다. 한편으로 이상주의자를 대변하는 덴마가 살인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돼 도망극을 펼치는 과정에서 만나는 소시민들과 그들의 이야기. 그 속엔 현실과 시대를 살아가는 약자들의 의견과 어떤 연대가 그려지기도 한다.
또 <20세기 소년>에서 지구를 지키는 켄지 일당 또한 지극히 평범하고 소시민적이지 않는가. 어떤 야망도, 욕심도 없던 그들이 ‘친구’(지구 정복을 꿈꾸는 등장인물)에 대항해 싸우는 것을 통해 나는 소시민들의 연대를 봤다. 거대 권력에 맞선 그들의 연대가 만들어낸 어떤 정의.
기실 ‘정의사회 구현’을 구호로 내세웠던 한국의 80년대는 실재 ‘정의로운 사회’가 아니었다. 그 풍경을 봉준호는 <살인의 추억>으로 절묘하게 잡아냈다. 과연 우리에게 정의는 무엇이었을까.
<살인의 추억> 포스터
한편으로 연쇄살인범을 단순히 ‘악’이나 ‘정신이상자’로만 규정하는 것은 정당할까라는 물음. <몬스터>에서 10여 년간 십 수 명을 살해하는 연쇄살인범 ‘요한’은 과거 동독 정부의 살인기계 양성 프로젝트의 희생자로 인격 장애를 앓고 있었다. <괴물>의 ‘괴물’은 비단 미국의 독극물 방류 뿐 아니라, 우리 내부의 괴물이 빚어낸 재앙이었다. <20세기 소년>의 ‘친구’는 어떤가. 한 개체, 한 사람의 순간적인 충동으로만 그것을 설명할 수 있나. 만화나 영화보다 더 잔인하고 악랄한 이 사회가 만화 속의 살인범양성소와 크게 다를 바 있는지 명쾌하게 설명해볼 사람. 그 사람 내가 와인 쏜다.^^;
<몬스터>에 나오는 이 대사. 나는 잊지 못한다. “내 안의 괴물이 나를 잡아먹고 있어...”
언제 우리는 그렇게 ‘괴물’에게 잡아먹힐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끊임없이 악의 평범함을 거부해야 한다. 맥락과 상관없이 뜬금없는 이야기지만, ‘OOO의 진실’이라는 이름으로 떠도는 유령을 아무 생각 없이 자신의 블로그나 미니홈피에 올려놓는 행위가 어떤 죄악인지 알아야 한다. 누구에게나 ‘괴물’은 있다. 내 안에 괴물이 증식하지 못하도록, 스스로가 숙주(Host)가 되지 않도록 두 창작자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이야기하는 것 같다.
아울러 한가지 더. 우라사와는 지난 5월 일본 ‘Invitastion’이란 잡지에 가수 우타다 히카루와 나눈 대담에서 <몬스터>를 그리기로 했을 때, ‘슬슬 시작하겠다’고 선언하는 느낌이 들었으며 ‘끔찍한 일이 생길 거라는 뜻으로 ‘MONSTER’라는 제목을 붙였다’고 했다. 모종의 결의표명. 그렇다면 봉준호 역시 ‘괴물’이라는 제목을 붙인 것도 그런 비슷한 의미가 포함된 건 아니었을까. 정성일 영화평론가가 <괴물>을 봉준호의 정치적 커밍아웃이라고 읽었듯 말이다. 그저 혼자만의 상상. 물론 아님 말구.^^;;
<괴물>의 일본 포스터
다음은 <괴물>의 봉준호 감독과 <20세기 소년>의 우라사와 나오키 작가가 만나 나눈 대담을 동료 배성준님 등의 도움으로 풀어놨다. 두 사람의 대담은 오는 24일 발간 예정인 일본 영화격주간지 ‘PIA’에도 실릴 예정이란다. <몬스터> 등 우라사와 작품에는 숨겨진 스토리작가가 있다고도 하는데, 존재 자체가 미스터리다. ‘몬스터’ 작가라면 의당 필요한 신비로움? 어쨌든 <괴물>도 일본에서 선보인다. 9월2일 개봉될 예정.
[동영상] 봉준호 감독과 우라사와 나오키(20세기 소년 작가)의 대담현장
<괴물>의 봉준호 감독, <20세기 소년> 우라사와 나오키를 만나다
봉 감독이 건네준 스토리보드를 보고 있는 우라사와 작가
봉준호 감독(이하 봉) : 참 오랜 시간 작업하신 것 같고. 저도 6년 전에 데뷔작인 <플란다스의 개>할 때는 <해피>라는 만화를 보면서 시나리오를 썼던 기억이 나고. <살인의 추억>을 찍고 준비할 때는 <몬스터>를 보면서, <괴물>을 준비할 때는 <20세기 소년>을 봤습니다. 영화 찍을 때 항상 제 손에 들려져 있었던 책이 (우라사와 선생의 책이었습니다). 항상 재밌게... 그렇게 오랜 시간 지치고 않고 작업해 오신 것이 놀랍습니다.
우라사와 나오키(이하 우라사와) : 괴물을 보고 기본적으로 생각이 똑같다고 생각을 했어요. 물론 태어난 장소는 달라도 머릿속은 아마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봉 : 우라사와 나오키 선생의 만화를 보면서 공감 내지는 느꼈던 것이 어둠이나 악에 대한 묘사를 할 때였습니다. 혹시 이 분이 기본적으로 휴머니즘에 대한 주제가 있고, 선이 악에 맞서 싸우지만 어둠과 악에 대한 매혹을 가지고 계신 게 아닌가하고. 물론 저의 상상이지만요. 저도 좀 그런 면이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거든요. 특히 <몬스터> 보면서 그런 면 많이 느꼈었는데...
우라사와 : 오히려 반대일수도 있어요. 그 강한 ‘악’의 힘에 끌려가기 싫어서 항상 자신의 평상심과 평화를 찾기 위해 발악하는 느낌이랄까...
봉 : <몬스터>에서 요한을 봤을 때였습니다. 1권에서 성인이 된 요한이 처음 등장하는, 공사 중인 건물에 서 있는 장면이 있어요. 그때 비오는 바깥 배경을 등지고 총을 쏘는 요한의 모습이라든가, 그런 컷들이 상당히 압도적으로 다가왔었습니다.
우라사와 : 세상에 ‘악’과 ‘선’이 있지만, 항상 악의 힘이 너무나 압도적인 느낌이에요. 제가 감독님의 영화를 보면서 특히 공감한 점은 주인공들이 항상 무언가를 먹고 있다는 점이에요. 먹어야지 싸울 수 있다는 그런 생각이 기본적으로 있기 때문에 아마 감성이 비슷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어요.
봉 : <20세기 소년>에서도 인물들이 먹고 있는 장면, 스토리상 꼭 필요하지 않아도 먹는 장면들이 있어서 저도 좋았습니다. <괴물> 같은 경우도 누군가가 누군가를 먹인다, 보호하고 맛있는 것을 먹게 한다는 것이 되게 중요한 모티브였어요. 약한 자를 보호하고 먹인다.
영화의 라스트신도 따뜻한 밥상을 차려주는 거잖아요. 송강호가 아이에게. 따뜻한 밥상을 차려놓고 잡혀간 딸이 나타나는 판타지 장면도 있고. 먹는다는 것 자체가 사람이 어떻게 살아남는가, 생존하는가와 와 닿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괴물>의 합동분향소 장면
우라사와 : 영화를 보면 딸이 실종이 되고, 가족들이 울면서 장례식을 하는데 거기서 보여주는 웃음의 센스가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 만화 <20세기 소년>에서도 동키가 죽을 때 옆에서 스님이 밥 먹고 있는 장면이 있는데 슬픈 장면을 웃게 만들고, 웃긴 장면을 슬프게 만드는 그런 구도가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봉 : 그런 복합적인 감정, 슬픔이나 웃음이 동시에 교차되는 그런 느낌들은 한국이나 일본처럼, 같은 아시아 사람들끼리 훨씬 더 잘 느낄 수 있는 것 같아요. 깐느영화제에서 상영됐을 때도, 유럽 사람들은 합동분향소 같은 장례식장의 그런 형태 자체도 낯설뿐더러 여기서 웃어야 되는 것인가, 슬퍼해야 되는 것인가를 놓고 주저하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그런데 한국이나 아마 일본의 관객들은 반응이 다를 거 같아요. 그 신에 대해서. 섬세하게 금방 따라갈 수 있을 것 같고, 그런 면에서 정서적으로 통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저도 <20세기 소년>보면서 가장 놀라웠던 것은 일본의 60년대, 90년대, 2000년대가 동시에 그려지는데 약간의 연도차이만 있을 뿐 어렸을 때 주인공 꼬마들이 놀았던 방식이나 디테일들이 우리가 어릴 때 놀았던 것과 너무나 비슷하거나 똑같거든요. 저도 그렇게 비밀기지 만들어서 제가 직접 이상한 마크도 그렸어요. 그런 생생한 디테일이나 감성들이 너무 잘 통해서 놀랐어요. 교감이랄까, 그런 느낌들이 인상적이었어요.
통역자 : 선생님께서 고등학교 때 괴생물체를 보셨다고 실제로...
봉 : 그게 한국에서도 기사가 많이 나가서.. 제가 고등학교 때 상태가 안 좋았던 것으로, 고등학교 때 본드를 하지 않았느냐, 이런 얘기까지 들었는데.(웃음) 그런 건 아니고.
저는 되게 곱게 자란 모범생입니다. 흠. 입시 스트레스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헛것을 본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는데... 한강에 검은 괴생물체가 다리 교각을 타고 올라가다가 물에 떨어지는 것을 고등학교 때 봤습니다. 집에서 봤죠. 아파트 창문에서. 한강이 보이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그게 어떻게 보면 최초의 아이디어가 됐었습니다.
웃고 있는 우라사와 나오키. 옆에 <괴물> 일본 포스터도 보이네~
우라사와 : 저도 사실 어릴 적에 귀신을 본 적이 있어요. 옛날 큰 집 같은 곳이었는데 남들이 안 믿어줄 것 같아서 말하지는 않았지만 만화로는 그렸죠. 그런데 지금은 그런 경험담들이 사람들 사이에서 많이 말해져서 TV프로그램에서 매년 그 집에 가곤 하더라구요.(웃음)
통역자 : (우라사와 작가님이) 18~19살 때 진짜 귀신을 봤대요.
봉 : 제가 한강에서 봤을 때와 똑같은 나이네요. 고 나이 때 힘든가봐요, 원래.(웃음)
봉 : 몇 살 때 만화를 처음 그렸는지 궁금합니다.
우라사와 :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테츠카 오사무 선생님의 그림을 그리고 직접 사인도 했었어요. 그리고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2학년 정도부터는 노트에 스토리를 스스로 만들어서 그렸었어요. 지금도 그건 간직하고 있어요.
통역자 : 감독님 몇 살 때 즈음에 영화감독이 되고자 했나요?
봉 : 중학교 3학년 때, 무슨 사건이 큰 게 있었던 건 아닌데 그 시점부터 뭔가 평생 이걸 해야겠다고 해서 자료 같은 것을 모았던 기억이 나요.
그리고 영화감독이란 사람들은 다 어떤 과정을 밟아 감독이 됐을까 바이오그래피를 찾아보기도 하고. 중간에 영화가 아니라 애니메이션을 해볼까 또는 감독이 아니라 촬영감독을 해볼까라는 갈등을 몇 번 한 적은 있었지만 크게 봐서는 딴 생각을 하거나 마음이 흔들린 적은 없었고 중3때부터 지금까지 쭉 왔었던 것 같습니다.
영화를 하고 감독을 하게 됐지만, 만화가에 대한 미련은 여전히 남아 있어서, 물론 그림을 잘 못 그리니까 포기했지만, 학생 때 대학가서도 계속 만화를 그렸습니다. 그런 미련이나 꿈이 약간은 남아있는데 그런 것을 영화 스토리보드를 그릴 때 해소하는 것 같아요. 영화 콘티나 스토리보드 그릴 때, 그게 만화하는 것과 비슷하거든요.
그래서 오늘 우라자와 선생님께 드리려고 선물을 가져온 것이 있습니다. <살인의 추억> 특별판 DVD인데, 제가 직접 그린 스토리보드도 있습니다. 우라자와 선생님같은 대가 앞에서 이런 것 보여드리려니까 되게 창피한데, 어쨌든 제가 직접 그린 드로잉이 있습니다. 영화도 한번 보시고.
우라사와 : 고맙습니다. 너무 좋습니다. 일본에서 만화가 하실 수 있겠는데요.(웃음)
봉 : 우라사와 선생님 만화는 상투적이지 않고, 손에 잡힐 듯이 생생한 캐릭터와 상황들을 통해서 선이 어떻게든 악이 맞서 싸울 수밖에 없고, 그런데 그 과정은 너무나 험난하고 힘들다는 느낌을 아주 현실감 있게 보여주시는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런 부분들은 <몬스터>나 <20세기 소년>에서 되게 감동적으로 와 닿는 부분 같습니다.
우라사와 : 사회에서 봤을 때,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가 생각해보면 그것은 항상 사회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 같아요. ‘정의’란 무엇인가 라는 것도 역시 시대 상황이나 배경에 따라서 규정되는 것이 아닌가 해요. 그런 면에서 ‘보편적 정의’를 찾기 위해 항상 생각하고 사는 것 같아요.
봉 : 사실은 7시간 정도 이야길 더 하고 싶은데 워낙 바쁘셔서 참도록 하겠습니다.
우라사와 : 저도 그렇습니다.
봉 : 그렇게 하면 20세기 소년 22권을 못 볼 것 같아서 빨리 일 하시게끔.. (웃음)
우라사와 : 끝나면 다시 이야기할까요? (끝)
대담 후기
봉준호 감독 <괴물>찍은 덕에 우라자와 선생님을 다 만나는구나 해서, 얘기하다보니 통하는 것이 많아서 의외로 기뻤다. <20세기 소년> 21권의 그림을 하나 그려서 저에게 사인을 해서 주셨기 때문에 거의 가보로 남게 되지 않을까...(웃음)
우라사와 작가 굉장히 닮았다는 느낌이었다. 둘 다 수줍음을 많이 타는 성격이고 그래서 한번으로는 부족하고 여러 번 만나서 서로를 알아가야 되지 않을까... 굉장히 닮았다고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