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종드 쭌/무비일락

고마해라, 마이 무따 아이가 … <브리트니 베이비, 원 모어 타임>

낭만_커피 2008. 7. 9. 15:28
어느 사회에나 완고하게 버티면서 개인을 억압하고 말살하는 기제가 존재하게 마련입니다. 일종의 '벽'과 같은 거죠.

대개의 사람은 좋고 싫음, 옳고 그름의 가치 판단을 떠나 사회라는 울타리에 내동댕이 쳐지면서 '길들여짐'의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한 사회 전반이 가진 '보편성'이란 굴레를 덧씌워 개인을 훈육하는 과정은 치밀하게 틀을 갖춰 '다수'란 이름으로 힘을 가지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정체성을 찾거나 사회 일반에 문제점을 제기할 경우 '소수'란 타이틀이 주어집니다.

제가 잘못 배운 건가요? 저는 일찌기, 민주주의는 '다수'와 '소수'가 다양성이란 이름으로 조화를 이루는 곳이라고 배웠어요. 그러나 이른바 '힘'을 바탕으로 한 쪽에 대한 일방적인 억누름과 획일적인 가치를 주입시켜 유지되어온 사회를, 겉으로는 '민주주의 사회'라고 명명하기도 하더군요.

이상한 일입니다. 가끔 혼돈에 빠질 수밖에 없죠. 제가 배운 민주주의는 그런 것이 아닌데... 어쩜 너무 한 쪽면에 길들여져 있었나 봅니다. 같이 사는 법을 일상 속에서 체화하지 못한 까닭인가 봅니다. 배운 그대로의 민주주의 사회가 아닌데, '왜' 우리는 민주주의 사회라고 믿고 사는 걸까요? 아, 누가 좀 알려주세요. ^^

음, 아마 2002년이었을 겁니다. 월드컵 4강 진출로 붕~ 떠 있던 한국. 부천시의 간섭으로 망가지기 전의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예기치 않게, 우연찮게, 만난 영화. 얼마 전, 주얼리에서 히트시킨, '베이비 원모어 타임'을 듣고 있자니, 생각이 팍 났던 영화. 그 5년 전, 휘갈긴 <브리트니 베이비, 원 모어 타임> 감상문. ^^ 국내 개봉은, 못했지요. 흥행이 전혀 안됐을 영화니까.ㅋ

참, '바비인형을 갖고 노는 꼬마부터 트렌치 코트를 입은 아저씨까지 사로잡은' 미국 대중문화의 아이콘이었던 '브리티니 스피어스'가 지금 너무 망가진 것이 살짝 가슴은 아프네요. ^^; 본인은 지금도 여전히 행복하다면, 별로 할말은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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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즐거움을 만끽하게 되는 영화가 있다. 의외로 발견의 기쁨을 안겨다주는 그런 영화. 더군다나 관객들이 함께 박수치고 환호하게 되는 그런 순간을 맞이하게 되는 기억은 흔하지 않다.

부천 판타스틱영화제 참여 명목으로 사전 정보없이 <브리트니 베이비, 원 모어 타임>을 대했다. 보고 싶었던 영화가 매진된 탓에 ‘어쩔 수 없이’ 선택한 대안이었지만 예상을 넘은 쾌감을 느꼈다. 영화제 관객들은 일반 극장에서의 그들보다 좀 더 감정 표현에 자유롭고 행동의 제약도 덜 받는다. 축제를 즐기기 위해 찾아온 관객들은 영화와 정서적 거리감이 좁은 법이다.

<브리트니…>는 미국 팝계의 최고 아이돌 스타, ‘브리트니 스피어스’가 소재가 됐다. 제목도 그녀의 1집 타이틀인 <Baby One More Time>이 차용됐다. 그렇다고 그녀가 직접 출연한 영화는 아니다. 그녀를 통해 자아와 행복을 만들어가는 한 청년의 실화가 바탕이 됐다. ‘뒤돌아보고서 후회하지 않겠다’는 삶을 꾸리겠다는 청년이 자신의 성(性) 정체성을 찾아가는 여정이 시종일관 유쾌하게 진행된다.

짐작하겠지만 이 청년(로버트)은 브리트니 스피어스를 신봉하는 게이다. 브리트니는 ‘바비인형을 갖고 노는 꼬마부터 트렌치 코트를 입은 아저씨까지 사로잡은’ 미국 대중문화의 아이콘이다. 그런 그녀를 역할모델로 삼은 로버트가 ‘브리트니 스피어스 흉내내기 대회’에서 1등을 하고 한 기록영화 감독에게 픽업돼 그녀 흉내를 내면서 세상과 만나는 에피소드가 영화의 주를 이루고 있다. 셀러브리티(유명인)에 대한 미국인의 광적인 중독도 함께 보여진다.

성(性)역할에 대해 완고한 기준을 들이대고 있는 한국에선 분명 손가락질 감이다. 물론 다른 나라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나름의 차별이 있으리란 건 충분히 예상 가능하다. 어쨌든 남자(라고 태어날 때 규정된 성)가 여자(로 정체성을 바꾸고 싶은 성)로 행동하는 건,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겠지만 정서적인 난도질은 물론 숱한 묘멸의 시선도 감당해야 할 판이다(주류나 다수라고 깝죽거리는 시덥잖은 꼴은 늘 소수나 비주류에 대한 억압의 자양분을 먹고 자란다. 그들의 일용양식이다).

개인의 선택은 언제나 사회제도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한다(고 훈육받는다). 사회는 엄연히 ‘자아’가 있고 성향이 각양각색인 개인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룰을 가동해 왔다. 어디 개인의 욕망이 국가나 사회의 것이 아님에도 안녕이니 질서유지와 같은 명목으로 지배계층의 잣대를 들이대는 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존재해 왔다.

한 사람을 규정하는 카테고리에 ‘성(性)’은 선택 사항이 아니다. 하긴 출생에서부터 국가, 가족, 성(姓)도 예외가 아니지. 심지어 안락사나 자살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드러내는 것을 보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개인이 자신을 위해 선택할 수 있는 게 얼마나 있는 지. 사적 자치의 개념은 획일적인 가치를 지향하는 사회에선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다.

로버트는 극중에서 ‘브리트니’역할을 통해 사람들을 만난다. 가식없이 그녀를 만나보고 싶다는 일념하나로 역할모델에 충실하게 다가서는 과정은 정말 흥겹다. 유명인 흉내를 내면서 자아를 발견하는 과정은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겠다”는 로버트의 당당함을 자랑스럽게 여기게끔 유도한다. 특히 그를 철저히 이용하려는 극중 기록영화 감독의 구질구질함과 미디어의 상업적 작위성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그를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도 참으로 다양하고 웃기다. 주유소의 마초 아저씨들이 브리트니로 착각해 로버트를 따라 춤을 추는 장면이나 병원에서 로버트의 가짜 가슴을 보고선 브리트니의 비밀을 지켜준다며 공언했다가 이내 동료 의사에게 떠벌리는 순박한 사람들을 보는 잔재미가 있다. 그들과 정서적인 공감대를 형성하는 건 브리트니 스피어스가 아닌 로버트가 지닌 캐릭터의 힘에 의존한다.

소수자로서 느끼는 강박이나 압박이 분명히 존재할 터이지만 시종일관 자신을 잃지 않고 여정을 소화하는 발걸음이 유쾌하고 가벼웠다. 함께 떠들고 춤추고 싶을 정도로. 당당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거리낌없이 내지르는 그 모습도 부러웠다. 다수와 주류라는 껍질의 시선에 끌려다니지 않고 그 포악한 손에 포획되지도 않았다. ‘타자(他者)’로서 휩쓸리지 않은 채 자기 의지로 발걸음을 내딛는 행보는 그깟 주최측의 농간따위 무시해 버릴 수 있다.

입 발린 상투적인 ‘민주주의’같은 거 말고 일상에서야말로 개인의 다양성을 인정해 주는 사회가 그립다. 억지춘향식으로 개인을 획일화시키는 작당같은 건 그만두고 그동안 먹은 걸로 만족해야 할텐데. 로버트가 그러지 싶다. “고마해라, 마이 무따 아이가”

☞ <브리트니 베이비,원 모어 타임>의 배우 로버트 스티븐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