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브레터 for U

발끝에 머문 추억을 공유하고 있는 친구, 병률에게…

낭만_커피 2008. 6. 14. 22:18
올해도 과꽃은 어김없이 피었고, 우리는 다시 걸었다. 벌써 4년차 여정을 마쳤다. 가끔 그런 생각도 한다. 이 무심하고 앙상한 도시 생활의 폭압을 견뎌나가게끔 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함께 걷는 우리의 여정이 아닐까하고. 내년에 다시 꿀 꿈이 있기에 세월의 하중을 버티고 서 있는 셈이지.



우리만의 10억 추억 만들기

올해도 마찬가지로 바람이고 싶고, 강물이고 싶은 우리네 마음을 길 위에 꾹꾹 눌러 담고 한 다발 추억도 심었구나. 지구상 모든 생명이 그러하듯, 언젠가는 다 식어빠지고, 밑동이 드러나고, 이빨까지 빠질 뻔하디뻔한 삶의 한 자락에 우리는 짧은 쉼표를 찍고 한 박자 템포를 늦췄다. 갖다 대려면 얼마든지 많은 이유를 붙일 수 있겠지만 어디 사람살이가 이유만으로 모든 것이 설명되겠냐. 그냥 길이 있었고 너와 내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 아니었겠냐.  

나희덕 시인(국밥 한 그릇)이 언급했듯, ‘잘 비워낸 한 생애가 천천히 식어가는 동안’, 켜켜이 쌓고 있는 이 기억의 나이테가 무척이나 소중하다. 무엇보다 ‘너와 함께’라는 그것이 언젠가 맞닥뜨릴 삶의 끝에서 내가 품고 갈 수 있는 하나가 됐다.

사랑과 이별도 그렇지 않은가 말이다. 추억할 것이 많은 사랑의 행로가 마음을 풍성하게 만들고 최악의 이별은 추억할 것이 전혀 없다는 것 아니겠냐. 광풍처럼 불어 닥치고 있는 1억, 10억 만들기와 같은 현대적 삶의 궤적에서 너와 나 마냥 자유로울 순 없겠지만 네가 어느 라디오에서 나온 멘트라며 해줬던 “10억 원 가치의 추억 만들기”에 나는 전적으로 동감했다. 누가 보면 돈 없는 놈들의 하릴없는 넋두리이자 푸념일 뿐이겠지만 나는 너와 함께 10억 원 가치를 훌쩍 넘을 추억들이 쌓여가고 있음에 감사하고 있다.

그 행로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생각은 없다. 누군가의 말마따나 굳이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심에서 나 역시 벗어나고 싶다. 그건 단지 한발 한발 내디딜 때마다 기억이 되고 추억으로 저장됐을 뿐이니까. 터벅터벅 뚜벅뚜벅 그 모습처럼, 나의 발, 나의 눈, 나의 가슴을 통해 들어온 모든 것을 고이 받아들이고 싶었던 게지. 우린 길의 감식자도 아니고 행랑채에 머물러 국밥 한 그릇 말아먹은 나그네였던 것 맞지?  

방파제에 산산이 부서진 하얀 파도들 앞에서 폼 잡거나 모래사장에 발을 다독거리며 두런두런 나눴던 이야기들, 거의 차도 다니지 않고 쭉 뻗은 밤길을 전봇대 숫자를 세며 단축 마라톤 했던 기억. 이방인을 향해 짖어대는 개들 앞에 주눅 들어 날름 도망갔던 소심자들의 모습. 그래 올해도 우린 반딧불이가 안 보인다는 소리를 하기 무섭게 그들을 보았지. 추억은 방울방울이구나.



켜켜이 쌓이고 있는 너와 나의 추억의 나이테

그 추억의 행로와 맞닿았던 한 영화가 있다. 네가 보지 못했겠지만 <원더풀 라이프>는 ‘삶이라 불리는 심호흡을 끝내고 나는 무엇을 추억하면서 저승으로 갈 수 있을까’ ‘내게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언제였더라’라며 자문하게끔 만든다. 이승과 저승의 문턱을 넘어갈 즈음 마음에 품을 추억을 떠올리지 못하면 그 문턱을 넘어서지 못하는 영혼들이 거기에 있다. 머리 속에선 이런 저런 영상들이 가지를 친다. ‘그래, 그런 때가 있었지…’ ‘아니 이건 어떨까…’하고 공연히 기억의 회로를 들쑤시게 만드는 무엇들.

아름답고 행복했던 순간을 영원히 가지고 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좋지 않겠니. <원더풀 라이프>는 상상의 공간이자, 지상에서 영원으로 가는 중간역인 ‘림보’에서 망자들이 머무르는 일주일을 보여준다. 죽음을 맞이한 이후 저승으로 가는 길목에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중간기착지에서 각 영혼은 하나씩 과제를 부여받지. 그 지난하고 다양한 삶의 스펙트럼 가운데 가장 행복했던 단 하나만의 추억을 골라내야 하는 것이다. 다른 모든 기억들은 망각의 늪 속으로 던져버린 채.

림보의 면접관은 망자들의 행복한 순간을 영상으로 재현시키고 망자들은 그 순간을 보면서 영원의 시간으로 편입한다. 대개의 망자들은 담담하게 살아생전 기억을 털어놓으며 자신이 죽음에 접어들었음을 쉽게 인정한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게 마련이겠지. 개중에는 추억을 선택하지 못해 저 세상으로 가지 못하는 이들도 있다.  

한편으로 독백처럼 풀어놓는 그들의 추억도 망자 중 한 사람이 얘기했듯 ‘기억을 이미지화 시킨 것’이라 불확실하고 가공된 측면을 내비친다. 따지고 보면 지나간 기억은 빛깔은 윤색되고 미화되기도 하는 운명 아니겠냐. 그러나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죽을 때까지 간직하고픈’, ‘힘들 때 의지하게 되는’ ‘마음에 힘이 되는’ 추억이 기실 개인의 삶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개인의 삶에 대한 심판을 통해 ‘천당’과 ‘지옥’으로 갈리는 양자구도가 아닌 망자가 행복한 사후를 ‘선택’한다는 그 인식은 참으로 많은 것을 얘기해주고 있더라.   

<원더풀 라이프>는 그렇게 삶의 일부분을 머리 속에 이미지화 시키는 작업, ‘추억’의 되새김질을 통해 관객에게 속삭인다. ‘림보’를 거치는 이들은 모두 같은 질문을 받지만 각 개인마다 행복의 순간은 다른 색깔과 모양을 지니고 있다. 삶의 순간마다 켜켜이 쌓아올려진 작은 일상의 편린들이 얼마나 소중할 수 있는지, 누군가와 함께 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행복한 일이 될 수 있는지, 영화는 너무나도 느린 템포로 화두를 던져준다.

무심하게 흐르는 시간 속에 매몰된 채 기계처럼 일어나 습관처럼 자판기 커피를 마시며 주변 사람들과 날씨 얘기를 나누거나, 거리를 하얗게 색칠하는 눈에 괜스레 짜증을 내며 죄 없는 담배만 빠끔거리는 일상의 조각들도 있다. 그러나 이도저도 아닌 것 같은 감정은 텅 빈 진공상태에서 무의미한 유영을 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원더풀 라이프>는 사후 세계를 빌어 일상에도 작은 의미를 지녀볼 것을 살며시 권유하더라. 그것 또한 추억의 나이테를 쌓는 일이니까.

너와 나의 그 추억도 일상의 한 결이다. 네가 받아들이는 색깔과 내가 다르듯, 각자의 이야기는 언젠가 약간씩 다른 추억의 빛깔로 변색될 수도 있겠지. 그러나 나의 추억 속에는 네가 함께 자리 잡고 있음을, 그 길이 있음을, 나는 감사할 수 있을 것 같다. 지울 수 없는 옛 사랑과 함께 고래처럼 숨 쉬고 있는 추억의 박동은 그렇게 언젠가 삶의 끝에서 나를 무난히 저승으로 인도해 줄 테니까.



추억이 있어 행복한 우리들

<원더풀 라이프>는 또한 행복에 대한 영감도 보여준다. 행복한 추억을 선택하지 못해 림보에서 면접관으로 일하고 있는 모치즈키는 다른 망자가 그 추억을 선택하게끔 도와주지만 정작 본인은 그러지 못한다. 물론 사연이 있겠지. 그리고 와타나베란 노인도 평생 동안 평범하기만 한 삶에서 행복의 순간을 채집하지 못한다.

그런데 모치즈키가 와타나베의 일생이 담긴 비디오를 보여주는 과정에서 모치즈키와 와타나베, 그리고 와타나베의 아내 사이에 얽힌 관계가 우연찮게 드러난다. 와타나베는 테이프를 돌리면서 평범하기만 한 삶에서 잊고 있던 어떤 기쁨을 깨닫고, 아내가 죽기 전 새로운 마음을 약속하던 순간을 선택해서 그녀와의 추억을 안고 떠난다. 사랑했던 여자가 자신의 죽음 직후 다른 남자를 선택했음을 쉬이 받아들이지 못했던 모치즈키도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지.

두 사람은 다른 시공간에서 서로를 질투하고 있었다. 우연히 발견한 와타나베 아내의 파일에서는 모치즈키가 죽기 전 함께 했던 순간이 담겨있었던 것이지. 50년 동안 림보를 떠나지 못했던 모치즈키도 자신이 다른 누군가의 행복의 일부분으로 존재했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행복한 추억에 대한 선택의 망설임에 종지부를 찍는다.

하지만 함께 림보에서 모치즈키를 짝사랑했던 시오리는 그와의 행복한 날들을 잊지 않기 위해 림보에 계속 남아있는 것을 택하더라. 두 사람은 엇갈린 선택을 하지만 행복의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도 알 수 있지 않냐. 누군가의 기억 속에 살아있는 한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행복의 일부분으로 누군가 존재하고 있음을.

생각해보면 조금 더 주위를 둘러보란 의미를 품고 있었던 것 같다. 나의 행복은 가족, 친구, 애인 등 그 누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으며 나도 그 누군가의 행복의 일부분이었으면 좋겠다는 것을. 항상 곁에 있지 않더라도 단지 누군가 있었다는 사실로 행복해 질 수 있기를.

림보에 다다를 그 날까지 행복했던 순간을, 그 영상을 마음속에서 가끔 재현해 보는 것도 어떨까 싶다. 추억을 먹고산다는 이야기처럼 누구나 가질 법한 삶의 아름다운 한때, 보물 같은 추억을 저 마음 깊은 곳에서 꺼내서 말이야. <원더풀 라이프>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저 세상에 편히 가기 위해서라도 이 세상에서 진한 추억 하나쯤은 만들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

그래서 듬성듬성하지만 한올한올 짜고 있는 내 추억의 나이테는 너와 함께여서 점점 진해지고 있다. 나는 준비된 저승길을 삶 속에서 짜고 있다. 림보에서 면접관의 질문에 나는 망설임 없이 진한 추억들을 담은 보따리를 풀어 놓을 수 있을 것 같다. 네가 겪진 못했지만 알고 있는 내 깊은 곳의 그 추억들까지 담은 보따리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이만하면 우리, 너와 나의 생에 대해 “원더풀 마이 라이프(Wonderful My Life)!”라고 불러도 되지 않을까. ^.^ 아름다운 동행, 나의 친구 병률아, 고맙다. 네가 있어서, 너와 함께 할 수 있어서.

(* 한겨레-대티즌 UCC공모전 응모작)